욕되지 않는 마음의 자리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는 노자 도덕경 44장에 구절로 "만족함을 알면 욕됨이 없고, 멈춤을 알면 위태함이 없어 가히 오래갈 수 있다"는 말이다. 더 좋은 것, 더 높은 것, 더 귀한 것, 이런 식으로 가다간 끝이 없으며, 적당히 멈출 줄 알아야 욕되지 않고, 위태롭지 않고, 그래야 오래갈 수 있다는 글이다.
말이 지족(知足)이지 실천이 매우 어렵다. 지(知)자는 아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 화살처럼 빠르다는 의미이고, 족(足)자는 발 모양의 지(止)위에 정강이뼈를 표시한 ‘ㅁ’을 함께 본뜬 글자로, 발을 의미한 후에 '만족하다"는 의미로 확대되었다.
출처 : 박일규, "지족불욕 (知足不辱 :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는다)", 충청투데이, 2012.09.09, https://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22496
`만족할 줄 알아야 모욕을 당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노자(老子)`에서 유래했다.
명성과 생명 중에 무엇이 더 절실한가(名與身孰親)? 생명과 재물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身與貨孰多)? 얻는 것과 잃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걱정인가(得與亡孰病)? 너무 아끼면 반드시 크게 쓰게 되고(甚愛必大費), 많이 쌓아두면 반드시 크게 잃게 된다(多藏必厚亡). 그러므로 만족할 줄 알아야 모욕을 당하지 않고(故知足不辱), 멈출 줄 알아야 위태롭지 않아(知止不殆), 오래 지속될 수 있다(可以長久).
이 말은 `한서(漢書)`의 `소광전(疏廣傳)`에도 보인다. 소광은 선제(宣帝) 때 태자의 스승이었는데, 후에 또 그의 조카 소수(疏受)도 태자의 스승이 되어 태자를 앞뒤에서 보필(輔弼)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를 영광이라고 하였지만 5년이 지나자, 그는 조카에게 `지족불욕(知足不辱), 지지불태(知止不殆)`라는 말을 하면서 사직(辭職)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황제와 태자는 이를 허락하고 그들에게 많은 퇴직금을 주었다. 소광은 고향으로 돌아와 이 상금으로 매일 음식을 차려 친척과 친구, 이웃 등 손님을 대접하였다. 이렇게 몇 해가 지나자 그의 자손들은 재산이 다 없어질 것을 걱정해서 친한 어른에게 부탁하여, 그가 소광에게 자손을 위해 밭과 집을 좀 사놓으라고 말하자, 소광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제가 자손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까? 제가 가지고 있는 밭과 집에서 자손들이 열심히 일한다면 살아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지금 자손들에게 재산을 이보다 더 많이 주면 그들은 게을러지게 될 뿐입니다. 재물이 많아지면, 현명한 사람은 의지가 약해지고, 우매한 사람은 잘못이 더 많아집니다. 게다가 부자들은 많은 사람들의 원망을 사지 않습니까. 비록 자손들을 잘 가르치지는 못했지만, 저는 단지 자손들이 잘못을 많이 저질러서 다른 사람들의 원망을 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요즘 CNK 문제 등 끊이지 않는 공직자들의 비리(非理)와 대비되는 장면이다. 우리는 매년 설날이나 명절마다 과식(過食)하고 과음(過飮)하여 탈이 나는 경험을 한다. 우리는 어찌 이 유혹(誘惑)을 뿌리치지 못하는가. 지족(知足)하고 지지(知止)할 줄 알아야 욕(辱)을 당하는 일이 없다.
출처 : 최정, "지족불욕(知足不辱)", 대전일보, 2012.01.26, https://www.daej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88886
월(越)나라 왕 구천(勾踐)의 신하 범려(范蠡)와 문종(文種)은 오(吳)나라를 멸망시키고 월나라가 패권을 잡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범려와 문종은 모두 고위직에 오르게 되었는데, 범려는 구천을 믿을 수 없다고 여겨 월나라를 탈출한다.
범려가 본 월왕 구천은 고생할 때는 함께 지만, 자신이 성공해 부귀를 누릴 때면 교만해져 모든 것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는 성격이었다. 범려는 구천이 패권을 잡았으니, 자신을 포함한 모든 공신들을 죽일 것이라는 예측을 한 것이었다.
범려는 문종에게 관직에서 물러나라고 편지를 통해 권한다. 이때 범려는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도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를 다 잡고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라는 문구를 썼다고 전해진다. 범려는 문종을 탈출시키려 했으나 문종은 자신이 누리는 권세를 쉽사리 포기하지 못했고, 구천에게 결국 반역 의심을 받고 자결하게 된다.
이때부터 ‘토사구팽’이라 하면 열심히 일했지만, 쓸모가 없어지니 야박하게 버리는 일을 뜻하게 되었다. 우리가 일상에서도 사용하는 ‘팽 당했다’의 ‘팽’역시 삶을 팽(烹)자를 쓰며, 고사성어 ‘토사구팽’에서 유래된 말이다.
출처 : 김영호, "[백뉴스] [너의 어원은] 열심히 일한 당신, 팽 당할 시간? ‘토사구팽(兎死狗烹)’", 백뉴스, 2021.06.29, https://www.100news.kr/25356
오늘날 우리의 식탁은
배를 채우기보다
불안을 달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다."
불욕은 욕망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욕망에 끌려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욕됨은
가난함이 아니다.
적게 가짐도 아니다.
끝없이 더 가지려다
자신을 소모하는 상태다.
지족이
“이미 충분하다”는 감각이라면,
불욕은
“더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태도다.
지족이
삶을 현재로 데려오는 힘이라면,
불욕은
그 자리에 머무르게 하는 힘이다.
지족이 채움이라면
불욕은 비움이 아니라
추가하지 않음에 가깝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놓칠까 봐 먹는다.
남들보다 뒤처질까 봐,
이 즐거움을 다시 못 느낄까 봐.
그래서 배가 불러도
젓가락을 내려놓지 못한다.
욕망은 늘 말한다.
아직 끝이 아니라고.
불욕은
그 속삭임을 완전히 없애지 않는다.
다만
그 말에 바로 응답하지 않는다.
한 박자 늦춘다.
그 지연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되찾는다.
채식이 불욕과 만나는 지점은
결핍이 아니라 중단이다.
더 자극적인 맛으로
입을 밀어 넣지 않는 선택,
과잉의 조합을
굳이 만들지 않는 태도.
채소 위주의 식사는
욕망을 즉각 만족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불편하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 속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욕망과 거리를 둔다.
불욕은 금지가 아니다.
통제도 아니다.
자기 신뢰다.
지금 이 정도면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 감각.
노자가 말한
욕되지 않는 삶이란
적게 가진 삶이 아니라
자신을 잃지 않는 삶이다.
더 가지려다
몸을 잃지 않고,
더 누리려다
마음을 잃지 않는 상태.
불욕은 묻는다.
정말 필요한가,
아니면 그냥 더 갖고 싶은가.
그 질문 하나로
식탁은 조용해지고,
삶은 조금 가벼워진다.
이제 욕망은
삶의 주인이 아니라
그저 지나가는 손님이 된다.
생활 속 실천
1. 일주일에 하루, 한 끼를 욕망을 빼고 요리하기
2. 먹는 도중, 욕망을 추가하지 않기
3. 먹고 난 뒤 생각하기
“오늘 나는 무엇을 잃지 않았는가.”
올랭프 드 구쥬를 생각하며
우리는 무엇을 차별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무엇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