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길이 없다는 것
대도무문(大道無門)의 뜻
그렇다면 선에서 말하는 대도무문은 무슨 뜻인가? 대도무문이란 말은 송나라 후기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 선사가 지은 ‘무문관(無門關)’에 나온다. 무문 스님은 선문의 대표적인 화두 48개를 소개하면서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부처의 말 중에 근본은 마음이다. 진리의 문에는 문이 없다. 문이 없는데 어찌 뚫고 갈 것인가? 듣지 못했는가? ‘문을 통해서 들고나는 것은 잡된 것이요, 인연으로 얻은 것은 결국 부서지고 말 것이다.’ 실은 이런 말도 평지풍파요, 멀쩡한 살에 종기짜는 칼을 들이댄 것이니 하물며 언어문자에 집착하여 지혜를 구하는 짓이야…”
大道無門 千差有路 큰 도에는 문이 없다. 천 갈래 길이 어디나 통한다.
透得此關 乾坤獨步 이 관문을 뚫고 간다면 천지에 홀로 걸어가리라.
무문 스님은 불교의 진리를 깨치는 길은 들어가고 나가는 문이 없는 무문(無門)이라 한다. 만약 문이 있어 들어가고 나감이 있다 한다면 상대분별에 떨어져 양변이 되니 잡스럽다. 또한 얻을 것이 있다 한다면 상(相)이니 결국 허망할 것이라 한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여래는 오고감이 없다.’ ‘모든 있는 바 상(相)은 다 허망한 것이니 상이 상 아님을 보면 여래를 보리라’ 하는 말과 같은 이치다. 이런 말조차 옥상옥이고 긁어 부스럼이다. 그래서 게송을 하나 지으니 “큰 도에는 문이 없다”는 대도무문이고 이 관문을 뚫으면 천지에 가장 고귀한 존재인 것이다.
선사의 법문이나 부처님의 〈금강경〉이나 중도와 무상(無相) 도리를 말하는 것은 똑같다. 우리가 ‘나’가 있다는 분별에 떨어지면 오고 가는 나도 있고, 들어가고 나감도 있으니 결국 생사 윤회하는 괴로움을 영원히 피할 수 없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무아, 중도의 정견을 세우면 ‘나’라고 한 실체가 없으니 오고 감도 없고, 들어가고 나감도 없으며, 안과 밖이 중도불이로 존재함을 알게 된다. 이것이 부처님이 깨친 불교의 진리다. 이 불교의 진리에는 들어가고 나오는 문이 없는 무문(無門)이다. 그래서 불교의 진리인 큰 도는 들어가고 나오는 문이 없는 대도무문이라 한다.
출처 : 박희승, "들어가고 나갈 문 없는 ‘중도’", 현대불교, 2021.12.21, https://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03482
선으로 들어가는 문을 문 없는 문, 즉 무문(無門)이라 한다. 안거 동안 방문을 걸어 잠그고 수행하는 선방을 보통 무문관(無門關)이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을 닫아걸었으니 문이 없는 셈이고 그래서 붙은 이름이다. 그러나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말이 있듯이 큰길에도 또한 문이 없다. 선의 길을 대도무문이라 말하는 것은 깨달음이나 진리에 이르는 데에는 정해진 길이나 방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의 길은 문 없는 문을 찾는 무문(無門)의 길이다. 그래서 선은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까지 나아간 뒤 벽을 부수어 문을 만들거나, 아니면 문 없는 큰 길에서 스스로의 문을 찾아야 하는 역설이다.
출처 : 김형규, "선으로 가는 길에 없는 ‘문’을 만들다", 법보신문, 2023.07.05,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16920
제2차 세계대전의 광풍이 몰아칠 때 카잔차키스는 시베리아에 있던 조르바로부터 자신이 발견한 아름다운 녹색 보석을 보러 시베리아로 오라는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그때 카잔차키스는 철없는 아이 같은 조르바에게 실망한다. 지옥 같은 전쟁의 현실을 외면한 채 아름다운 녹색 보석을 보러 한가로이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해서 구경 오라니! 아름다움이 어쨌단 말인가! 아름다움은 비정해서 인간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가지 않았다. 그 후에 조르바에게서 다시 편지가 날아왔다.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합니다만 두목, 당신은 글쟁이에 지나지 않아요. 이곳에 왔더라면 아름다운 녹색 보석을 구경할 평생의 단 한 번뿐인 기회를 얻었을 텐데, 못 보게 되었군요. 가끔 나는 별로 할 일이 없으면 혼자 앉아 지옥이 있나 없나 궁리 해보죠. 하지만 어떤 글쟁이들은 진짜로 지옥에서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자유는 무엇이고 아름다움은 무엇이며 인간의 고통은 또 무엇이더냐. 우린 대부분의 시간을 머뭇거리며 망설이다 보내고 만다. 그런 나에게 조르바는 망설이지 말라고, 후회하지도 말라고 간곡히 말을 건네고 있다.
출처 : 유영호, "망설이지 마라, 후회하지도 마라", 시니어조선, 2013.12.24, https://senior.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2/24/2013122403304.html
우리는 무엇을 시작하기 전에
무조건 완벽하기를 바라며
시작을 망설이는 경우가 많다.
혜개는 <무문관>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도에는 문이 없다."
무문은
길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들어가는 문이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이다.
우리는 채식에도
정답의 입구를 찾으려 한다.
이렇게 시작해야 할 것 같고,
이 정도는 지켜야 할 것 같고,
그 문턱 앞에서
오래 망설인다.
무문의 식사는
들어오는 순간부터 자유롭다.
완전하지 않아도 되고,
매번 같지 않아도 된다.
어디서든
시작할 수 있다.
채식이 무문이 되면
정체성은 느슨해진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말보다
오늘 이렇게 먹었다는 사실만 남는다.
그 느슨함이
지속을 가능하게 한다.
못난이 농산물을 고르는 일도
무문의 선택이다.
이 재료는 이런 요리에만 써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없다.
손에 잡히는 대로
길이 열린다.
무문은
방향 상실이 아니다.
진입로가 여러 개라는 인식이다.
그 인식이
시작을 앞당긴다.
식탁에서 무문을 익히면
삶의 다른 자리에서도
시도가 늘어난다.
완벽한 조건을 기다리지 않고
일단 들어가 본다.
무문은 말한다.
문을 찾느라 멈추지 말고
열린 쪽으로 들어가라고.
이미 서 있는 자리도
충분히 입구일 수 있다고.
생활 속 실천
1. 일주일에 하루, 한 끼를 계획 없이 시작하기
2. 시작하기에 앞서, 정답을 찾지 않기
3. 먹고 난 뒤 생각하기
"오늘 나는 무엇을 망설이지 않았는가."
올랭프 드 구쥬를 생각하며
우리는 무엇을 차별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무엇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