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충분하다는 감각
知:알 지 , 足:발 족 , 者:놈 자 , 富:가멸 부
가난하더라도 자기 분수를 알아 만족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부유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남을 아는 것을 지라 하고, 자신을 아는 것을 명이라 한다(知人者智 自知者明).
남을 이기는 것을 유력이라 하고, 자신을 이기는 것을 강이라 한다(勝人者有力 自勝者强).
스스로 족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부자다(知足者富).
도를 따라 세차게 나가야 비로소 뜻을 얻었다고 하겠다(强行者有志).
자기의 근원을 잃지 않으면 영원할 수 있고, 죽어도 도를 잃지 않으면 장수할 수 있다(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
노자는 속세에서 말하는 지혜와 힘과 도에 입각하여, 참다운 명(明)과 강(强)을 말하였다. 그리고 참다운 부는 지족에서 얻을 수 있으며, 뜻을 얻는다는 것은 무위자연의 도를 끝없이 세차게 행하는 것이라 하였다.
즉 '도를 따라 세차게 나가야 비로소 뜻을 얻었다고 하겠다.'는 바로 <주역(周易)>의 건괘상전(乾卦象傳)에서 말한 '군자는 스스로 강하여 그치지 않는다(君子以自强不息).'의 경지와 같다. 또한 노자는 '근원적인 도를 잃지 않아야 영원할 수 있고, 몸은 죽어도 실체는 도와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하였다. 지족이란 말 그대로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이다.
<설원담총(說苑談叢)>에 '부는 만족할 줄 아는 데에 있다.'고 했으며, <명심보감(明心寶鑑)>에도 '만족할 줄 알면 항상 즐겁다.'고 하였다. 부(富)는 '많다, 넉넉하다, 여유가 있다'는 뜻이지만, 노자가 말하는 것은 물질적이 아닌 정신적인 부이다.
출처 : 임채헌, "지족자부(知足者富)", 경기헤드뉴스, 2011.11.24, https://www.ghnews.net/news/article.html?no=34814
지족(知足)이란 항상 자기 분수를 알고 만족한다는 말이다.노자 도덕경 33장 변덕(辯德)에 나온다.남을 아는 것을 지(智)라 하고,자신을 아는 것을 명(明)이라 한다(知人者智 自知者明).남을 이기는 것을 유력(有力)이라 하고,자신을 이기는 것을 강(强)이라 한다(勝人者有力 自勝者强).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부자다.(知足者富).설원담총(說苑談叢)에 '부는 만족할 줄 아는 데에 있다'고 했고 명심보감(明心寶鑑)에도 '만족할 줄 알면 항상 즐겁다'고 했다.
지족이란 말을 묘족(妙足),희족(喜足),희락(喜樂)이라고도 한다.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물질을 많이 가지는데서 행복을 찾으려고 했다.너무나 많은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할때 오히려 불행해 지는 경우가 많다.세상을 살다보면 뜻밖의 고통과 시련이 부득이 하게 찾아 온다.마치 좋은 음식이라도 과식하면 몸에 해로운 것처럼 과도한 소유는 자기가 바라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
출처 : 백성일, "[오목대] 지족(知足) - 백성일",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2009.07.21, https://www.jjan.kr/article/20090721318955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하다. 그러나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일은 불가능한 일같이 보인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게 욕망의 속삭임이지 않은가. 욕망은 언제나 바라고 원하는 생리를 가진 놈이라 이제 그만이라는 만족의 말씀을 결코 하지 못한다.
그놈은 배가 불러도 배부른 행복감에 들어 가 앉아 있지 못한다. 그 즐거움을 나중에도 확실하게 보장받기 위해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자꾸 쌓아 둘 생각에 골몰한다. 많이 가진 편이라고 좋아하다가도 제게 없는 사소한 것을 남이 가졌다면 이내 풀어 죽어 버린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욕망은 공룡을 닮았다. 자기의 몸집만 키우는데 온종일 바쁘다. 끝없이 먹어대는 일이 이젠 평범한 일상이 되었으니 세상은 어느덧 자신의 먹이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욕망이라는 공룡에게 고결한 것은 모두 없어지고 만다.
이런 욕망의 속성상 거기에는 평안이 없다. 욕망은 만족을 추구하면서도 만족을 모르는 것을 그의 목표로 삼기 때문에 항상 무엇을 욕구하며 미래로 나아갈 뿐이다. 채워진 것조차 결핍이 되어야 하는 기이한 악순환 속에서 현실은 미래의 성취를 위해 장미빛 부정으로 물든다. 어느덧 인간의 운명은 욕망의 운명과 동일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예로부터 성현들은 지족을 가르치셨다. 욕망이 채찍을 휘둘러 앞으로 앞으로 쉬임없이 우리를 말처럼 몰아가는 데 비해 지족은 언제나 삶의 현재성에 의해 실현된다. 이 현재성의 실현이란 삶의 중심에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최상의 깨어 있음이다. 삶은 깨어 있음의 불꽃으로 충일한 평안을 밝혀 준다.
오늘도 욕망의 조잡한 논리가 판을 친다. 정말 욕망하는 자리를 지족하는 자리로 바꾸지 않는다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어느 날에 이루어질 것인가.
출처 : 허성욱, "욕망에서 지족(知足)으로", 법보신문, 2021.04.13,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0016
우리는 늘 모자라다고 느낀다.
배는 불러도 마음은 채워지지 않고,
식탁은 가득해도 만족은 미뤄진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참다운 부는 지족에서 얻을 수 있다."
지족은 덜 갖는 기술이 아니다.
이미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감각이다.
부족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부족하다고 믿어서 불안해진다.
지족이 사라진 자리에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처럼 앉아 있다.
채식이 종종 결핍처럼 보이는 이유는
실제로 부족해서가 아니다.
‘충분하다’는 감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한 그릇의 채소 요리는
쉽게 만족을 주지 않는다.
천천히 씹어야 하고,
맛을 구분해야 하며,
포만감은 늦게 온다.
그러나 그 느림 속에서
감각은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충분해졌다는 신호를
몸이 스스로 보내기 시작한다.
지족은 묻는다.
정말 모자란가, 아니면 이미 충분한가.
지족은 멈추는 힘이다.
더 먹지 않아도 괜찮다는 판단,
더 사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
그 확신은 절제가 아니라 신뢰에서 나온다.
세상이 이미 필요한 만큼을 주고 있다는,
그 믿음이다.
우리는 자주 말한다.
나중에 만족하겠다고.
조건이 갖춰지면,
여유가 생기면,
조금 더 나아지면.
지족은 그 약속을 미뤄두지 않는다.
지금 여기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느냐를 묻는다.
지족의 식사는
완벽하지 않다.
소박하고, 반복되고,
때로는 단조롭다.
그러나 그 단조로움 속에서
마음은 점점 안정된다.
이미 충분하다는 감각을 되찾는 순간,
식탁은 더 이상 불안을 생산하지 않는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먹는 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생활 속 실천
1. 일주일에 하루, 한 끼를 의도적으로 적게 차리기
2. 먹는 도중, 배가 아니라 감각의 상태를 점검하기
3. 먹고 난 뒤 생각하기
“오늘 나는 언제 충분해졌는가.”
올랭프 드 구쥬를 생각하며
우리는 무엇을 차별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무엇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