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힘 없는 선택
무애(無碍)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막힘이나 거침이 없음, 장애물이 없음이지만, 이 말을 불교에서 산스크리트어 '아푸라티하타'를 의역하는 말로 사용하므로 그 쓰임의 깊이가 한층 깊어졌다. 이를테면 불가에서는 '무애지'란 말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무엇에도 거리낌 없이 모든 사리에 통달한 지혜를 말한다. '무애인'은 아무 것에도 막힘이나 거리낌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원효는 무애인이었다. 아들 설총이 태어나면서 스스로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이름하여 서민들과 더불어 술집 드라듦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느 때는 사당 안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조각에 빠지기도 하였다. 당시의 승계는 그런 원효를 향하여 '바람맞은 미치광이'라 비난하며 경멸하였다. 그러나 원효는 실천궁행을 목표로 하여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였다.
출처 : "무애(無碍)라는 말이 있다... < 애오개 < 오피니언 < 기사본문", 한국성결신문, 2010.11.10, https://www.keh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016
서라벌로 돌아온 원효는 다시 독학으로 불도를 닦는 한편, 구법을 위한 행각에 나섰다. 바야흐로 원효의 풍류행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양산 영취사로 낭지대사(郎智大師)를 찾아가 <법화경>을 배우고, 고대산 경복사로 보덕화상(普德和尙)에게 찾아가서는 <열반경>과 <유마경>을 배웠다. 그리고 다시 서라벌로 돌아와 <발심장>을 지어 포교에 힘쓰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세월은 물 흐르듯 흘러갔다. 원효는 요석 공주와 잠자리를 함께 하고 파계하여 스스로 법의를 벗고 속인의 옷으로 갈아입은 뒤 자신을 가리켜 소성거사(小性居士) 또는 복성거사(卜性居士)라고 불렀다.
그의 깊은 뜻을 제대로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소성이나 복성이나 자신을 한껏 낮추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특히 복성의 복(卜)자는 아래 하(下)자의 아래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는 또 무애거사라고 자처하기도 했는데, 이는 글자 그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즉 자유롭게 풍류를 즐기겠다는 뜻이었다.
-모든 것에 거리낌 없는 사람만이
한길로 생사의 번뇌를 벗어날 수 있으리. -
(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
그는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통을 얻어서 둘러메고 방방곡곡을 다녔는데 그 모습이 하도 괴상해 그것을 두드리고 노래하고 춤추며 다니니 수많은 사람이 재미있게 구경했다.
그가 두드리고 다닌 박통이 바로 ‘무애박’이요 그의 노래가 바로 ‘무애가’였으니 원효는 그동안 왕실과 귀족 중심이었던 불교를 서민 대중을 위한 종교로 끌어내리기 위해 이처럼 민중 속에 뛰어들어 충격적인 방식으로 포교를 했던 것이다.
불법의 진리를 요즘의 유행가처럼 서민과 친근한 향가로 지어 알아듣기 쉽게 부르며 포교를 했는데, 원효의 이 독특한 교화방식 또한 그 나름의 풍류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출처 : "[풍류의 향기] 원효대사 파계 후 '무애거사' 자처하며 민중 속에서 자유로운 삶 구가", 불교닷컴, 2006.03.23, https://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271&replyAll=&reply_sc_order_by=I
대승불교의 최고 경전이라고 일컬어지는 화엄경. 화엄경에서는 네 종류의 '법계(法界)'를 이야기한다.
법계는 보통 '깨달음의 차원'으로 해석한다. 첫째는 이무애(理無碍)의 법계이다. 형이상학적인 이치에 걸림이 없는 단계이다. 둘째는 사무애(事無碍)이다. 현실의 일처리에 걸림이 없는 단계이다. 셋째는 이사무애(理事無碍)이다. 형이상학적인 이치뿐만 아니라 현실의 일처리에도 아울러 통달한 경지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넷째 단계는 사사무애(事事無碍)이다. 일과 일에 걸림이 없는 단계를 가리킨다. 최고의 경지는 사사무애이다. 이러한 네 단계의 차원을 공부하면서 드는 의문은 ‘사사무애’란 과연 어떤 경지인가 하는 것이다. 하늘의 이치와 땅의 일에 모두 걸림이 없는 이사무애의 경지에 이르면 공부는 사실상 끝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출처 : 조용헌, "[조용헌 살롱] 사사무애(事事無碍)와 예수의 판단", 조선일보, 2005.02.28,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5/02/28/2005022870328.html
이건 지금 먹어도 될까.
우리는 식사 앞에서도
자주 멈춘다.
원효는 노래하고 춤추며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다."
무애는 방해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방해에 걸리지 않는 상태다.
이건 맞는 선택일까
이런 고민이
손을 멈추게 한다.
무애의 식사는
멈추지 않는다.
완벽하지 않아도
흐름을 잇는다.
선택을 평가하지 않기에
자연히 앞으로 나아간다.
채식이 무애가 되면
윤리와 취향이
서로 부딪히지 않는다.
지금 가능한 쪽으로
부드럽게 이동할 뿐이다.
그 유연함이
지속을 만든다.
못난이 농산물을 고를 때
무애는 더 분명해진다.
기준에 걸려 멈추지 않는다.
쓸 수 있으면 쓴다.
그 단순함이
막힘을 없앤다.
무애는
무책임이 아니다.
지나치게 얽히지 않는 태도다.
그 덕분에
선택은 가벼워진다.
식탁에서 무애를 경험하면
삶의 다른 자리에서도
마찰이 줄어든다.
굳이 멈추지 않아도 될 일들 앞에서
한 발 더 나아가게 된다.
무애는 말한다.
흐름을 막는 것은
상황이 아니라
과도한 판단이라고.
지나갈 수 있다면
지나가도 된다고.
생활 속 실천
1. 일주일에 하루, 한 끼를 멈추지 말고 바로 먹기
2. 먹는 도중, 선택을 평가하지 않기
3. 먹고 난 뒤 생각하기
"오늘 나는 무엇을 멈추지 않았는가"
올랭프 드 구쥬를 생각하며
우리는 무엇을 차별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무엇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