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엘뤼아르, "게르니카의 승리"

완전한 빛

by 룡하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1937년 4월 26일. 독재자 프랑코를 지원하는 히틀러가 스페인 북부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를 폭격한다. 이 폭격으로 마을 인구 3분의 1에 해당하는 2000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비극이 일어난다. 유럽 예술가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같은 해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를 전시한다. 전쟁의 잔혹함을 비판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당시 박람회장에는 피카소의 그림만 걸려 있었던 게 아니다. 한 편의 시도 같이 전시됐다. 바로 폴 엘뤼아르의 '게르니카의 승리'였다.


"살고 죽기 위한 공포와 용기 / 그렇게 어렵고 그렇게 쉽기도 한 죽음 / 보석을 노래하게 한 사람들과 보석을 망쳐버린 사람들."


엘뤼아르는 저항시인의 대명사처럼 여겨진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의 시는 목적이 예술을 넘어서지 않았다. 그의 시에는 거친 구호도 다급한 분노도 없었지만 충분히 강력했다.


출처 : 허연, "[허연의 책과 지성] 폴 엘뤼아르 (1895~1952)", 매일경제, 2017.08.25, https://www.mk.co.kr/news/culture/7951734



게르니카


“내 학생 때의 공책 위에/ 내 작은 책상과 나무들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쓴다 그대 이름을” 이라는 외침으로 시작되는 ‘자유’라는 제목의 시를 써서 프랑스 최고의 저항시인으로 알려진 폴 알뤼아르(Paul Eluard, 1894~1952)와 20세기 회화의 위대한 거장 파블로 피가소(Pablo Picasso, 1881~1973)와의 관계는 남다른 예술적 동지애로 묶여진 드문 예에 속한다. 그들은 특히 ‘게르니카의 비극’이라는 처참하기 짝이 없는 인간말살의 전쟁과 파괴에 대항하여 각각 시로, 그리고 그림으로 공동의 예술적 항거를 강렬하게 보여준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스페인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1937년 4월 26일 일어난 게르니카 마을의 처참한 파괴는 이 두 예술가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무차별 쏟아 붓는 엄청난 양의 폭탄투하로 거의 모든 주민들이 몰살 당하는 역사상 가장 끔찍스런 인간말살의 비극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국의 불행한 대사건에 눈 감을 수 없었던 피카소는 분연히 붓을 들어 그 해 6월 3일 ‘게르니카’(1937, 사진)라는 제목의 대형 그림을 완성한다. 6월 4일 그 그림은 엘뤼아르의 시(詩) ‘게르니카의 승리’와 함께 만국박람회의 스페인 관에 전시된다.


피카소와 아주 친근한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했던 시인 화가인 아르스는 ‘파블로 피카소’에서 이 그림이 엘뤼아르와의 뜨거운 연대감정 속에서 태어났음을 밝히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이 그림이 제작되는 동안에도 자주 대화를 나누었던 엘뤼아르의 사상적 전개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게르니카’는 개인적인 원한과 증오의 차원을 넘어서, 스페인 내란, 프랑코의 폭력과의 투쟁을 출발점으로 하지만, 마침내 보다 더 넓은 차원의 높은 전인류적 시야로, 폭력과 전쟁과 죽음과 암흑에 대항하여, 평화와 행복한 여인과 아이들을 수호할 것을 인류에게 직접 호소하는 그림이다”


엘뤼아르가 ‘게르니카의 승리’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도 ‘전 인류적인 시야’로 폭력과 전쟁과 죽음과 암흑에 맞서 투쟁하지 않으면 안되는 참여적 리얼리즘의 정신이라 할 것이다. 그는 ‘게르니카의 승리’에서 “포화에 견디는 얼굴”, “뒤집혀진 죽은 심장”, “저마다 자신의 피를 보여주는” 여인들과 아이들 등의 참혹하게 일그러진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이는 피카소가 ‘게르니카’에서 보여주고자 한 참담한 인간 파과의 영상에 대한 시적 변용으로서 동일한 전쟁에의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하겠다.


이러한 뜨거운 연대감정과 정신적 동지의식은 그들 사이의 친분관계가 기본적으로 참다운 우정을 저버리지 않는 지속적 진실성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무엇보다 순수한 시의 진실을 끝끝내 잃어버리지 않은 채 서로서로의 가치를 드높여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출처 : 이가림, "인간파괴 고발한 예술 동지", 2008.05.14, https://www.hangyo.com/news/article.html?no=24847



세번째 격자틀 인식 모형, 역사 14화 우즈베키스탄, "티무르" 편에서 아름다움(신이 현존한다는 증거, 신 = 일자 = 좋음의 이데아)을 인지하기 위해 아름다움에 대한 동서양의 철학과 세계관에 대해 책을 쓰고자 한다고 적었다.



3. 완전한 빛에 대한 향수


3.1. 내면의 빛


엘뤼아르는 그의 예술론에서 그가 오랫동안 열정을 가지고 연구하고 읽어온 궁극적인 출발점이자 도착점에 대해 “완전한 빛에 대한 향수”로 설명한다. 시인은 완전한 빛에 대해 외면의 미학과 내면의 미학이라는 두 측면으로 설명하며, 시와 그림이 보여주는 진실과 아름다움에 대해 강조한다. 그렇다면 시인이 말하는 완전한 빛은 어떤 특성을 보여주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첫 번째로, 완전한 빛은 도덕적인 빛으로 나타난다. 엘뤼아르는 그림이 보여주는 색깔을 예로 들어 “물질적인 빛은 필연적으로 도덕적인 빛으로 귀결되어야 한다”14)고 강조한다. 또한 시인은 자신이 읽어온 작품들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물질적인 미학에서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미학으로 지나왔다고 주장하고, 그 과정을 “외면의 미학에서 내면의 미학”15)으로 전환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이 말하는 도덕적인 빛은 곧 내면의 정신적인 빛을 의미한다. 달리말해 엘뤼아르가 강조하는 물질적인 미학은 시와 그림이 보여주는 언어나 색깔, 이미지 등 질료적인 형상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뜻하며, 독자들은 작품이 주는 아름다움을 통해 내면의 미학인 감동이나 감탄을 느끼게 됨을 의미한다. 나아가 작품이 주는 도덕적인 빛은 독자의 삶을 아름답게 하며, 사물의 본질을 깨닫게 한다.

두 번째로, 완전한 빛은 시와 그림이 보여주는 “아름다움과 진실”이다. 엘뤼아르는 시와 그림이 추구하는 근원적인 진실은 곧 아름다움이라 말한다. 그리고 아름다움과 진실은 서로 등가적인 가치를 지닌다. 시인은 “진실은 교차하고, 빛은 꺼졌다 다시 밝혀진다. 확신과 불안, 숙련과 순진함, 인식과 직관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경쟁한다. 말하자면 아름다움의 진실, 진실의 아름다움은 더 좋은 평가를 받는 큰 기쁨을 위해 서로 경쟁한다.”16)고 설명한다. 즉, 시나 그림이 갖는 진실은 곧 아름다움을 통해 증명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엘뤼아르가 말하는 완전한 빛에 대한 향수는 시나 그림이 주는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로 볼 수 있다. 시인에게 아름다운 것은 진실 된 것이고, 진실 된 것이 아름답다. 달리말해, 시인이 추구하는 완전한 빛, 도덕적인 빛을 보여주는 작품은 이름다움과 진실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살펴본 시나 예술작품이 주는 영감, 즉 영혼의 울림현상은 곧 시나 그림이 갖는 아름다움과 진실에 의해 생성되는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울림은 외부의 물질적인 빛이 내면의 빛으로 육화되어 우리들의 영혼을 일깨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시나 그림이 주는 아름다움, 내면의 빛은 어떻게 생성되어 독자의 마음에 울림을 불러올까? 바슐라르는 “화가는 빛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화가는 어떤 광원에 서 빛이 비쳐 나오는지를 알고 있다. 그는 붉은 빛깔의 열정의 내밀한 뜻을 살아가고 있다. 이와 같은 그림의 근원에는 싸우고 있는 영혼이 있다.”17)고 주장한다. 이처럼 바슐라르에 따르면 빛을 창조하는 것은 예술가의 열정이며, 그 열정이 불러오는 영혼의 다툼은 엘뤼아르가 말하는 아름다움과 진실의 상호대립적인 경쟁관계에 비유될 수 있다. 엘뤼아르는 시인이나 화가들이 보여주는 열정은 삶에 대한 열정이고, 타인을 이해하고 세상과의 관계를 맺기 위한 하나의 언어로 말한다. 또한 그는 열정은 오늘을 살게 하는 원동력으로 말하며, 현재의 예술작품은 투명한 의식, 행복한 상상력이나 이성과 같은 또 다른 열정의 요소들을 보여주는 이전의 작품들과 뒤섞여 나타난다고 말한다. 엘뤼아르는 그들이 빚어낸 열정적인 작품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상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힘으로 설명한다.18) 이처럼 과거와 현재의 시인과 화가들이 보여주는 열정을 통해 우리는 아름답고 진실된 사물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고, 세상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결과적으로 엘뤼아르가 말하는 시와 그림이 지닌 도덕적인 빛, 진실과 아름다움, 열정과 같은 완전한 빛에 대한 향수는 초현실주의 시인들이 이루려고 했던 완전한 인간에 대한 추구로 간주될 수 있으며, 보들레르나 랭보와 같은 선배 시인들이 추구했던 견자적인 특성에 견주어 볼 수 있다.

한편, 엘뤼아르가 말하는 완전한 빛은 독자의 마음에 감동과 감탄을 불러오는 내면의 미학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내면의 미학은 시와 그림이 주는 아름다움과 진실을 통해 일어나는 영혼의 울림현상으로 볼 수 있다.


14) Paul Eluard, OCII, p.516.

15) 참조, Ibid, p.516.
16) Ibid, p.517 : “Les vérités s'entrecroisent, les lumières s'éteignent et se rallument, la confiance et l'inquiétude, l'habileté et la naïveté, la connaissance et l'intuition concourent à un même but : la vérité de la beauté et la beauté de la vérité, pour le plus grand plaisir de la raison,"
17) Gaston Bachelard, La poétique de l'espace, Paris, PUF, 1989, p. 5. 바슐라르는 루오의 그림에 대한 르네 위그의 말을 빌려 그림이 보여주는 내적인 빛, 영혼, 열정을 강조 한다 :
“Mais ici c'est un peintre qui parle, un producteur de lumières. Il sait de quel foyer par l'illumination. Il vit le sens intime de la passion du rouge. Au principe d'une telle peinture, il y a une âme qui lutte.”
18) Paul Eluard, OCII, p.518. 시인은 “타인들이 자유를 얻을 때 시인 역시 자유로울 수 있고, 외부의 세상과 자신 사이에는 장벽과 소통의 문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 한다 : “Jesuis un homme et je puis reproduire mes désirs, je peux me rendre libre en libérant les autres. Et je sais que j'aborde là à la fois la barrière et la porte entre le monde extérieur et moi,"


출처 : 이병수. (2009). 폴 엘뤼아르(P. Eluard)시와 시론에 나타나는 견자적인 특성에 대한 고찰. 프랑스어문교육, 32, 321-346.



책에 완전한 빛을 넣고자 한다.



네번째 격자틀 인식 모형, 영화2 3화 Surviving Picaso 편에서 사랑에 목숨을 걸고 아름다움을 위해 죽기 위해 피카소의 아티초크를 든 여인과 알폰스 무하의 아르누보처럼 여성과 식물을 같이 그리는 보태니컬 아트를 하고자 한다고 적었다.


사랑에 목숨을 걸고 아름다움을 위해 죽기 위해 피카소의 아티초크를 든 여인과 알폰스 무하의 아르누보처럼 여성과 식물을 같이 그리는 보태니컬 아트를 완전한 빛을 담아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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