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일본, "오다 노부나가"

정치수단이 된 다도

by 룡하

일본에서 글로컬리제이션 전략을 수행하여 오다 노부나가를 주인공으로 한 헤리티지 미디어아트 갤러리와 더불어 F&B 사업을 하기 위해 오다 노부나가의 다도에 관해 알아보고자 한다.



1568년에는 기타이세(北伊勢)와 오우미(近江)를 평정하고 9월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호위하여 입경하여, 그를 무로마치 막부 제15대 장군으로 임명받도록 하며, 실세로써 권력의 정점에 이르렀다. 노부나가는 서화를 익혀 능통하며 다도를 즐겼는데, 당시의 다도는 소박하고 검소하며 무일물의 경지를 이상적인 세계로 여기는 이른바 와비(わび)의 다도를 추구하는 경향을 띠었다.

그러나 그는 와비의 이상세계을 구현하며 즐거움을 누린다는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다도구라는 물질주의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했다. 무력으로 전국 다이묘를 제압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확보하는 한편 사카이의 상인을 굴복시켜 경제력을 확보하자, 본격적으로 다도구의 수집에 나섰다. 권력과 재력을 동원하여 수집한 다도구는 중국에서 수입한 것, 이미 명물(名物)이라는 평가를 받아 유명해진 다도구, 즉 값비싼 다도구를 소장하려고 애섰다. 다도에 능통하며 다도구의 가치를 분별하는 감식안을 지닌 사카이의 유력한 상인출신의 다인에게 능력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대권력자이자 무사이기 때문에 값비싼 다도구를 소장하지 않았다고 하여 체면이 손상되거나 평가가 나빠질 상황은 아니지만, 노부나가는 다도와 다도구를 철저하게 정치수단으로 활용하였다.

1568년 제14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히데(足利義栄)가 재위한지 9개월만에 병들어 죽자, 노부나가는 자신에게 항거할 세력이 없음을 확인하고 요시히데의 4촌인 요시아키를 호위하여 교토로 들어갔다. 요시히데는 조정으로부터 제15대 장군으로 임명받음으로써, 공로자인 노부나가는 실권을 장악했다. 이때부터 노부나가는 권력의 정점에서 대항하는 무장과 사찰세력를 격퇴하고 각지의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통일된 정권을 수립하는 기초를 마련했다.

이와 과정은 강력한 무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전개되었으며, 이 시기는 이전까지 유행하던 서원차(書院茶)2)가 시들해지고 새로운 와비차 방식이 대두되었다. 넓은 방에 중국에서 수입한 미술품이나 다도구 등의 장식품을 호화롭게 꾸며놓고 음식과 술을 마시면서 차도 마시고 놀이도 즐기는 방식인 서원차는 보다는 소박하고 검소하며 선적(禪的)인 정신세계를 중시하는 와비차가 유행하기에 이른다.


2) 서원차는 무사계층이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연회이자 차맛을 겨루는 놀이로써 정치적 권력자 사이의 교류수단이기도 했다.



연말의 축하로 하시바 히데요시가 하리마로부터 부름을 받고 노부나가에게 갈 때, 옷 수백 점을 진상하는 한편 여자들에게도 줄 물품도 많이 준비해가지고 갔다. 이렇게 많은 선물은 처음이라고 모두가 크게 놀랐다. 이에 대하여 노부나가는 「이나바국 돗토리의 각성과 강적을 이런 놈쯤이야 하며 신명을 다하여 평정한 무공은 전대미문의 명예이다」라고 상장을 주었다. 히데요시의 위신은 한껏 드높아졌다. 12월 22일 히데요시는 크게 만족한 노부나가로부터 상으로 명물 다도구 12점을 하사받고 영지 하리마로 돌아갔다.30)


공을 세운 부하에게 여러 가지 상을 줄 수 있지만, 다도구는 특별히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상품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금은이나 현금과 달리 교환성은 약하지만, 당시로써는 다도란 아무나 할 수 있는 손쉬운 놀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도를 알고 다도구로 가지고 있으며 다회를 개최할 수 있는 사람은 특권층으로써, 교토나 사카이의 일부 유력 상인이나 다이묘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다도구를 하사받는다는 것은 다도구라는 값비싼 재화를 획득한다는 물질적인 특혜는 물론 다도를 해도 좋다는 특권을 부여받는다는 상징성을 지니는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30) 信長公記 권14 歳暮の御祝儀として、羽柴筑前守秀吉、播州より罷り上り、御小袖数 弐百、進上、其の外、女房衆かた、それぞれへ参らせられ、か様の結構生便敷様躰、古今承り及ぱず、上下と耳目を驚かし候ひ訖んぬ。今度、因幡国取鳥、名城と云ひ、大敵と云ひ、一身の覚悟を以て一国平均二申しつけらるゝ事。武勇の名誉、前代未聞の旨、御感状頂戴なされ、面目の至り、申すばかりなし。信長公御満足なされ、御褒美として、御茶の湯道具、十二種御名物、十二月廿二日、御拝領侯て、播州へ帰国侯ひしなり。



노부나가공으로부터 여러 차례 상과 상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다지마의 금산을 비롯하여 다도구에 이르기까지 두루 갖추어주셨습니다. 「다도는 정치의 도」의 하나라고 합니다만, 내게도 다도를 해도 좋다고 허락하셨습니다. 이승에서는 물론 저승에 가더라도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누구에게도 허락해주시지 않으셨음을 생각해보면 감사하여 밤낮 없이 눈물이 나옵니다. 오다 가문 일족에게 어찌 소홀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34)



이글을 쓸 당시 히데요시는 주군 노부나가를 죽인 아케치 미쓰히데를 물리치고 후계자를 자청하면서 노부나가에 대한 충성을 서약했다. 자주 상을 주셨으며, 다도구도 갖추어 주셨다. 다도란 곧 정치의 도라고 하는데 이처럼 중요한 다도를 해도 좋다고 허락해주셨으니 감격스러워 눈물을 참을 수 없다. 이 표현은 과장되어 있다고 해도, 히데요시는 다도를 매우 중요한 정치 수단으로 여기고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다도는 정치의 도(政道)라는 말은, 다도가 정치의 방법 혹은 수단이 된다는 말이지, 반드시 허가를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당시에는 많은 다인이 활동하고 있었고, 이전부터 많은 센고코 다이묘들이 다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사적인 공간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다회를 위정자가 일일이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완전히 통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하기보다, 다도가 지닌 정치수단으로써의 기능을 잘 이해하고 활용하겠다는 의미로 파악할 수 있다.

즉 노부나가는 무력으로 권위를 유지하는 한편, 유형적으로는 다도구라는 재화를 하사하고, 무형적으로는 다도 개최 특권을 하사함으로써 정신적 문화적인 면으로도 부하를 장악하고자 했던 것이다.

1500년대의 일본과 1800년대의 북아메리카의 특정한 문화현상은 시대적으로도 지리적으로 크게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비교하는 데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른다. 그러나 노부나가의 다도와 포틀래치 사이에는 「최고 권력자가 권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단 모은 재화를 나누어주는 행위」라는 공통된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조적 유사점은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1872-1950)가 주장한 「증여론(贈與論 Essai sur le don」을 참고로 살펴볼 수 있다.

북아메리카 서부 해안부의 원주민인 콰키우틀(Kwakiutl)족의 추장이 이웃지역에 재화를 증여하는 풍속인 「포틀래치(potlatch)」가 미국의 학자들에 의하여 조사보고 된 바 있다.



그들은 축제가 진행되는 것처럼 물건을 교환하는 일로 유명하다. 이것을 포틀래치라고 한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을 상대방에게 준다. 귀중한 것이면 귀중한 것을 줄수록 더 큰 권위를 획득한다. 이들은 권위를 획득하기 위하여 증여한다. 또는 상대가 자신에게 증여해줄 때 생기는 공포로부터 도망하기 위하여 이전 보다 더 큰 것을 증여한다.35)



추장은 담요나 장식용 동판(銅版)을 이웃 지역의 추장들에게 대량으로 증여함으로써 위신을 세우고 내부적으로는 가족과 마을에서 최고의 지위를 유지하게 되며, 외부적으로는 평화를 도모하는 수단이 된다. 포틀래치란 원래 식사를 제공하다 또는 소비하다라는 뜻이다.

이들로써는 매우 값비싼 재화를 남에게 미치광이처럼 퍼주는 증여와 소비, 또는 힘들여 모은 부(富)를 잠깐 사이에 상실 또는 파괴하는 까닭은 생활에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추장과 가신 사이, 가신과 그 추종자 사이에는 이러한 증여에 따라서 위계서열이 확립된다. 준다는 것은 자기의 우월성, 즉 자기가 더 위대하고 더 높으며 주인(magister)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답례하지 않거나 더 많이 답례하지 않으면서 받는 다는 것은 종속되는 것이고, 손님 또는 하인이 되는 것이며, 작아지는 것이고 더 낮은 지위(minister)로 떨어지는 것이다.36)



이와 같은 추장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증여행위라는 포틀래치의 구조는 「명물 다도구의 수집 → 소유를 확인 → 다회 개최 → 다도구 보여주기 → 하사」를 반복했던 노부나가의 다도를 설명하는데 상응하는 모델이 라 할 수 있다.



34) 熊倉功夫 외(1994) 資料による茶の湯の歴史(上) 主婦の友社 pp.329-330

上様重々預御褒美御感状、其上但馬金山御茶湯道具以下迄取揃被下、御茶湯雖御政道、我等は被免置、茶湯を可仕と被仰出候事。今生後生難忘存候。たれやの御人かゆるしものにさせられるへきと存出候へは、夜昼泪をうかめ、御一類之御事迄あたにも不存候事。

35) 栗本慎一郎(1984) 経済人類学 東洋経済新聞社 p.19

36) 마르셀 모스, 이상률 역(2002) 증여론 한길사 pp.267-268



출처 : 박전열. (2010). 오다 노부나가의 정치수단으로써의 다도. 일본연구, 28, 425-446.


위 논문을 통해 오다 노부나가가 1800년대 북아메리카 추장이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했던 증여 행위, 포틀래치와 비슷하게 다도를 정치수단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 글에서 천도 사상을 바탕으로 자비(어연민), 무위(어위광)를 통해 신과 불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지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는데 자비와 무위와 더불어 다도 또한 오다 노부나가의 권위를 높이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오다 노부나가 당시의 다도는 소박하고 검소하며 무일물의 경지를 이상적인 세계로 여기는 이른바 와비(わび)의 다도를 추구하는 경향을 띠었다고 하는데 이를 일본의 F&B 사업에 적용할 수 있을 듯 하다.


다음 화는 일본의 소박하고 검소하며 선적(禪的)인 정신세계를 중시하는 와비차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keyword
이전 01화일본, "오다 노부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