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적인 방식의 신격화
이미 유명한 이야기가 돼버린 ‘울지 않는 새’는 세 사람을 단적으로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울지 않는 새가 있다면, 오다 노부나가는 "그 새를 죽이겠다"고 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새를 울게 하겠다"고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짧은 이야기 속에 세 사람의 인간성이 짙게 배어난다.
출처 : 유신준, "울지 않는 새는 죽여라 : 기타미 마사오가 지은 < CEO 오다 노부나가 경영 10법칙 >을 읽고", 오마이뉴스, 2005.09.09,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79441
고등학생 때 일본으로 캠프를 갔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캠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캠프 가기 전에 재일조선인과 같은 일본과 관련된 역사를 공부했었다. 일본 역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전국시대였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 3명은 전국시대를 통일한 영웅으로 알려져 있는데 울지 않는 새를 죽이겠다고 하는 오다 노부나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확실히 도요쿠니 다이묘진과 도쇼 다이곤겐이 된 히데요시나 이에야스와 달리 노부나가는 사후 신으로 모셔지지 않았다.
필자가 보기에 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당 사원(소켄지 摠見寺)을 참배하고 깊은 신앙과 존경을 바치는 자가 받을 수 있는 공덕과 이익은 다음과 같다”18)라는 소켄지 앞에 세워진 고찰(高札)이다. 직접 노부나가를 참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소켄지라는 사원을 전면에 내세운 점이 중요하다. 즉 민중에게 공덕과 현세의 이익(부귀 장수 건강 평화 자손번창)을 내려주는 주체는 소켄지(의 불)이었다. 노부나가는 자신을 직접 참배하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았고 명목상 소켄지의 참배를 매개로 자신(신체)도 민중에게 받들어지는 간접적인 방식의 신격화를 택하였다. 직접 신이 되어 참배의 대상이 된 히데요시 이에야스와는 구별되지만, 신불에 대한 민중의 신앙심을 이용하여 노부나가(신체)로 연결시키려는 움직임은 확인된다.
노부나가의 대표적 경제 정책인 관소 철폐에 대해 “왕래 여행자를 불쌍히 생각(憐愍)하시어, 노부나가의 분국(御分國) 내에 많은 관소들의 제역(諸役)을 거두어들여, 도비(都鄙)의 신분이 높고 낮은 모든 이들(貴賤一同)이 감사하게 생각하고 만족하였다”19)라고 평하였다. 노부나가의 자비심->지배층 민중들의 감사함이란 프레임이다. 노부나가의 자비는 대체로 도로나 다리 건설 등 서민 생활과 연관성이 깊은 사회 인프라 건설과 관련되어 나타나는데,20) 특히 노부나가가 전통적으로 불교 세력이 장악한 자비 관념을, 인프라 건설을 통해 자신의 자비(御憐愍)로 치환하고 다시 이를 민중의 감사와 신앙심으로 연결시키는 구조가 주목된다.
18) フロイス日本史5, p.134.
19) 信長公記, p.91.
20) 비와코 근처 세타 다리 건설과 관련해서도 “다리의 넓이는 4간(間), 길이는 160간여(間余), 양측에 난간이 있고 후대(末代)를 위해 튼튼하게 건설하라고 지시하셨다. 천하를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면서도 왕복 여행자(往還旅人)를 불쌍히 여긴 것(御憐愍)이다”(信長公記, p.192)라고 하였다.
천하의 안녕을 바라고, 왕래 여행자에 대한 연민과 자비심이 매우 깊어 노부나가님에 대한 가호(御冥加)나 좋은 보답(御果報)은 세상 누구 보다 뛰어나 노부나가님이 오래 번영할(御長久) 기초이다(A). 그럼에도 노부나가님이 ‘도(道)를 배우고 몸을 바로 세운 것은 이름(御名)을 후대에 남기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B). 경하스럽다.26)
그런데 이 문장에서 (A)의 노부나가에게 가호 보답을 내린 주체는 무엇이고, (B)의 이름과 관련된 도란 과연 무엇인가 다소 불명확하다. 그렇지만 신장공기전체 용례를 감안해 보면, (A)의 주체는 앞(1575년 6월 아마나
카의 원숭이)에 나온 ‘제천(諸天)의 보답(御冥利)’의 제천(諸天)이거나 혹은 제천과 혼용되어 사용하는 불천(佛天)으로 추정되며, (B)의 도는 여러 곳에 산견되는 천도로 보인다. 이시게 다다시(石毛忠)는 “신장공기에서도 불천(佛天) 제천(諸天)이 천도(天道)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27)라고 불천 제천 천도가 혼용되어 사용된 것으로 파악하였지만, 적어도 이 문장에서는 장구(長久=복과 목숨)로 보답하는 (A)의 제천(諸天=佛天)과 이름(名)으로 보답하는 (B)의 천도는 구분되어 사용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노부나가는 (A)처럼 제천(諸天)의 가호 보답을 부정하지 않았고, 전통적인 신불의 역할(御冥利의 주체)을 인정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28) 노부나가가 공격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학문을 하지 않고 악행을 일삼은 승려이지 불교 그 자체는 아니었다는 다나카 요시나리(田中義成)의 지적은 실로 타당하다.29) 노부나가는 소켄지라는 사원(佛)을 적극적으로 활
용하여 민중의 신앙을 이끌어 내려고 하였다. 또한 동시에 노부나가는 가마쿠라 후기 이후 널리 퍼진 천도도 의식하고 있었다. 신불이 내리는 가호 보답과 별도로 (B)처럼 (천)도를 배워 (천도로부터) 이름을 후대에 남기게 해 주는 보답에도 관심을 보였다.
26) 信長公記, pp.128-129.
27) 石毛忠, 戰國 安土桃山時代の思想, 思想史(體系日本史叢書23), 山川出版社,
1976, p.12.
28) 다만 신불이 아닌 제천이나 불천으로 표현된 점은 주목된다.
29) 田中義成, 織田時代史, 講談社, 1980, p.192.
이시게 다타시(石毛忠)에 따르면 천도 사상은 유교의 경천(敬天) 사상과 불교의 응보(應報)관이 결합된 윤리주의와 운명주의적 속성을 가졌다.39) 이처럼 천도가 미지의 불가사의한 일을 주재하는 주체로 간주되다 보니, 왕왕 모든 일은 결과론적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적지 않았다.40) 다만 천도의 절대시가 곧 인간의 수동성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당시 무사들은 천도에 수동적으로 순응하기보다, “실로 하늘(天)이 준 기회”41)라고 하면서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평소 정당한 인과를 쌓아 그에 걸맞은 보답을 얻으려는 모습도 확인된다. 무사로서 지켜야 할 윤리에 따라 올바르게 행동하면 천도가 자신이나 자신의 후손(가문)에게 이에 걸맞은 보답을 내릴 것이라고 인식하였다.42)
39) 일본에서 천이란 매우 다의적 언어로 사용되어 천공(天空), 천상세계, 천지만물의 조화, 주재신(主宰神), 수호신, 이치 법(理法), 운명 등을 의미하였다(石毛忠, 前揭戰國 安土桃山時代の思想, p.10).
40) 오미 국의 슈고였던 롯카쿠 조테이(承禎)에게 부탁받은 명사수 스기야 젠주보(杉谷善住坊)는 총으로 노부나가를 암살하려 하였다. 그런데 거리가 불과 12,3간(間) 거리(1간은 6척[1.818미터], 21.816 23.634미터)였기에 보통은 빗맞을 수 없는 거리였음에도 총탄은 “천도가 보살펴(天道昭覽) (노부나가를) 스쳐 지나갔”(信長公記, p.108)다는 식이다.
41) 越後上杉謙信宛書狀寫, 信長文書518號.
42) 다케다의 멸망에 대한 신장공기에서는 “노부토라(信虎)로부터 신겐(信玄), 신겐으로부터 가쓰요리(勝賴)까지 삼대(三代), 사람을 죽인 일은 몇 천 명인가 셀 수도 없다”(信長公記, p.388)라면서, “인과(因果)가 분명한 시절이다. 천(天)을 원망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을 탓할 수도 없다”(信長公記, p.389)라고 하였다.
노부나가는 천황 존재 자체를 불천 제천의 가호 보답과 연계시켰다. 1572년(元龜3)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노부나가가 쇼군 요시아키를 비난할 때 “(전대 쇼군) 요시테루님(光源院殿)이 궁궐에 들려 천황께 인사 올리는 일(御參內)을 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가호(御冥加)를 받을 수 없게 된 일(요시테루가 부하에게 살해당한 일-역자 주)이 예전에 있었다. 그래서 이번 대에는 매년 소홀하지 말라고 노부나가가 요시아키님이 교토 상경할 때 말씀드렸지만, 벌써 잊으시고 근년 궁궐 방문(參內)이 끊어진 것은 아쉽기 짝이 없다”58)라고 하였다. 천황을 잘 보살피는 일이 제천(불천)의 가호와 연결되어 있다고 인식한 것이다.59) 실제 노부나가는 “천황의 저택(禁中)이 이미 파괴되어 위신이 서지 않기 때문에 수리를 하면 가호(御冥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어”60) 천황 거처 수리에 나섰다.
그런데 노부나가는 신사 천황의 종교적 가호에만 의존하지는 않았다. 통상 ‘무위’(武威)라 지칭되는 노부나가의 어위광을 강조한 사례가 있다. 신사 천황의 종교적 권위를 활용하는 방식과 별개로 노부나가가 무사의 위세 위광이 추상화한 형태인 어위광을 매개로 무가 수장의 권위를 확립하려는 움직임도 확인된다.
58) 信長公記, pp.141-142.
59)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타다의 관직 수여도 “이번 노부타다(菅九郞)의 유례없는 활약에 대해 황공하게도 천황(天帝)로부터 문서(御院宣)를 받아 아키타 조노스케(秋田城介)에 임명되니 가호(御冥加)의 극치이다”(信長公記, p.205)라고 하였다.
60) 信長公記, p.128.
출처 : 박수철. (2022). 오다 노부나가의 神格化 - 『信長公記』를 중심으로 -. 동양사학연구, 161, 231-261. 10.17856/jahs.2022.12.161.231
전국 시대를 통일한 영웅 중 오다 노부나가만 간접적인 방식의 신격화를 사용했다. 천도 사상을 바탕으로 자비(어연민), 무위(어위광)를 통해 신과 불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지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논문(출처의 논문)을 읽으며 가장 흥미로웠던 사실은 천도 사상이다. 천도 사상은 유교의 경천 사상과 불교의 응보관이 결합되었다고 하는데, 오다 노부나가는 인과응보 법칙을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과응보(因果應報)란 행위의 선악에 따라 결과가 결정되는 법칙이다.
출처 : 출처 : 김상준, "기고-인과응보(因果應報)", 경남도민신문, 2024.01.28, http://www.gn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80774
나 또한 인과응보 법칙을 믿는다. 인과응보 법칙에 따라 이 브런치북, 세번째 격자틀 인식 모형, 역사 브런치북을 연재하는 것은 내가 배부른 소크라테스, 인문학을 즐기되 경제적 여유(풍요)를 가진 사람이 되는 것에 기여할 것이다.
다음 화는 오다 노부나가의 다도에 관해 알아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