謝靈運, "過始寧墅"

산수미

by 룡하

<過始寧墅>


束髮懷耿介,逐物遂推遷 15세에 굳은 지조 품었으나, 세상일 좇다 보니 마침내 변하여

違志似如昨,二紀及茲年 본심을 어긴 것이 바로 어제 같건만, 20년도 넘게 지나 올해로 들어섰네

緇磷謝清曠,疲薾慙貞堅 세속에 물들어 맑은 기상 사라지고, 피로에 지쳐서 곧은 의지 잃은 몸

拙疾相倚薄,還得靜者便 벼슬과 병마가 한꺼번에 닥쳐와도, 은자의 편안함을 품에 안게 되었네

剖竹守滄海,枉帆過舊山 발령 받고 영가군의 태수가 되어, 돛단배 굽이 몰아 고향산천 들르니

山行窮登頓,水涉盡洄沿 산행을 하느라 한없이 오르내리고, 배 타고서 물길을 한없이 오고갔네

巖峭嶺稠疊,洲縈渚連綿 뾰족한 바위가 산등성이에 첩첩이고, 큰 물선 주위로 잔 물섬이 이어 있으며

白雲抱幽石,綠篠媚清漣 흰 구름이 깊은 곳의 바위를 쓰다듬고, 푸르른 대나무가 잔물결을 건드리네

葺宇臨廻江,築觀基曾巔 강물 굽어보이는 곳에 초가집을 짓고, 산봉우리에 터를 닦아 누관을 짓고는

揮手告鄉曲,三載期歸旋 두 손을 흔들며 고향 친지들에게, 3년만 지나면 돌아오겠다고 기약하나니

且為樹枌檟,無令孤願言 장차 느릅나무와 개오동나무 심어, 저의 소망 저버리지 않도록 하소서


이 시는 영가군으로 내려가던 도중 고향인 始寧縣에 들러 지은 것이다.

시의 서두에 세사를 쫓다 실패한 착잡한 심경을 과거로 소급해 미뤄두었던 자신의 원래 뜻을 확인하고, 영가로 쫓겨 가지만 ‘은자 될 편의를 얻었네(得靜者便)’라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다.11)

그가 36세 되던 해, 晋이 劉裕에 의해 멸망을 하게 되고 宋이 세워진다. 그는 宋朝에서도 벼슬을 받기는 하였으나 38세 되던 해인 永初 3년(422)에는 永嘉의 太守로 좌천 되었다.

束髮이 15세를 이를 경우 넷째 구절의 24년을 보태면 39세가 되는데, 그의 나이 38세에 永嘉太守로 갔다는 <宋書>의 기록을 종합한다면, 이 시는 아마도 永嘉太守로 발령을 받아 가면서 고향이 있는 始寧縣에 들렀을 때 쓴 것임을 알 수 있다.12)

謝靈運은 시에서 자신의 본심은 속세를 멀리하고 자연에 은거하여 한적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 시에서 스스로 ‘자신은 節操를 품었다’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의 완고한 성격을 강직하고 솔직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로 마침내 좌천된 것을 탄식해한다. ‘불운과 질병이 서로 따라서 오히려 조용히 살 편안함을 얻게 되었네’ 라고 노래한 것은 그의 생활의 불운함이 지나치게 세상을 사는데 서둘렀던 점에서 기인된 것임을 이야기 한다.13)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그 당시의 시대 상황과 현실을 ‘부끄러움, 수치’로 인식하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11) 李光哲, <謝靈運 詩 硏究>, 延世大學校 博士論文, 1994, p.133

12) 강효금, <中國自然詩의 特性에 관한 硏究>, 啓明大學校 碩士論文, 1987, p.18

13) 《謝靈運》 中國 詩人 제 3권, 輯英社, 1983년, p,85 참조


출처 : 이정민. "도연명의 전원시와 사령운의 산수시 비교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경희대학교, 2008. 경기도



전 글에 중은(中隱)에 영감 받은 것을 책에 넣고자 한다고 적었다.


중당 문화가 발달 되면서 중당 사대부가 은일·원림을 매우 좋아한 것은 중국 봉건사회 후기 문화발전사에 심원한 의의와 영향을 인식하여 모두가 필요했기 때문에 원림에 대한 정이 갈수록 두터워졌다고 할 수 있다(왕의·김대원역, 2014). 중당 이후의 사회제도는 사대부들에게 은일에 대한 강한 욕구를 가져왔으나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여 은일만을 추구 할 수 없었다. 사대부들은 '대은'과 '소은'사이에서 혼란이 가중되었고, 이 때 백거이의 '중은설'은 전통적인 은일이론을 한층 향상시켰다. '중은'이론의 탄생과 시작은 모든 사상이 사대부의 운명과 이해관계에 포함 되어서 분명하게 표현해 낼 수 있었고, 이러한 요인은 사대부들의 문화예술 뿐만 아니라 원림예술까지 발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후세의 문인들은 백거이의 중은 이론을 숭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송대 이후 중은 이론은 송대 문인들에게 관직 생활에 있어서의 시비와 영욕, 좌절과 역경에 대해 백거이의 한적함과 득실을 잊는 태도를 모범으로 삼고 자신을 잘 조절하는 만족을 아는 인생관을 가르쳐 줌으로써(서진희, 2014) 북송초기부터 남송에 이르기까지 '중은'은 사대부들에게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져 문학과 원림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장거화와 공종은 '중은정', '중은당'이라 원림의 이름을 짓고, 범성대와 장효상, 소식은 중은에 관한 시를 지었다.

또한 백거이의 중은 이론은 중국 원림에 변화를 가져왔는데, 중당 이전의 사대부들은 대부분 순수한 자연으로 들어가 깨달음을 얻으려고 했지만 중당 이후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도회지의 집 뜰이나 정원에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했다.


출처 : 이원호, 안혜인, 신현실, 하태일 and 김소현. (2015). 백거이의 중은사상과 원림조영. 한국전통조경학회지, 33(1), 119-128.


중국에서 산수문학은 魏晉南北朝 시대 劉宋의 謝靈運에 의해 창시된 이후 오랜 세월 수많은 작품을 창출하였다. 이론적인 면에서도 장르적 경계를 넘어 예술론으로 발전하였다. 대표적으로 詩書一律의 입장에서 畵論과 통합되어 山水形象化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한국에서도 중국의 영향으로 일찍이 많은 漢詩작품이 지어졌다. 순수국문학에서는 時調와 歌辭에서 꽃을 피웠다. 그런데 산수문학은 문예사조의 한 흐름으로, 한·중 산수문학의 개별성보다는 공통점에 주목하여 산수형상화의 이론적 입론을 시도하고자 한다. 그런데 산수문학에서의 형상화는 산수미에 집중된다. 산수미를 어떻게 형상화하며 또 무엇을 형상화하였느냐는 것이다.

산수미는 형식미와 내용미로 나누어진다. 형식미는 자연환경이 가지는 고유한 구상형식을 말한다. 그래서 형식미는 기본적으로 감상자가 산수경물에서 사물구성형식을 인식하고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내용미는 감상자의 미의식이 산수경물에 반영된 것이다. 미의식은 객관적 산수경물을 정신의 영역으로 옮겨와 주관적 기준에 의하여 미의 여부를 판단하는 정신작용이며 미적 활동이다. 그래서 산수경물은 객관적 물상의 차원을 넘어 의식의 상관물이 된다. 즉 의미존재로 인식된다. 이 때 산수의 내용미는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산수의 형식미와 내용미의 결합에 의하여 意象이 성립된다.

그런데 산수문학에서의 산수형상화에 대한 논의는 意象과 意境 그리고 品格의 단계를 거치면서 예술구상단계와 방법에 관한 논의로 전개되었다. 이 중에서 意境은 意象의 조합에 의하여 가능하며 의경은 또한 품격을 형성한다. 또 의경은 境界라고도 하며 작가의 주관정의와 객관물경이 상호융합된 예술경계를 말한다.1) 그리고 품격은 산수시가가 이룩한 예술경계의 位相에 대한 비평적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산수형상화를 예술구상화의 과정과 방식이라 할 때, 산수형상화의 논의는 우선 意象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意象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의상은 意와 象을 가리키며 境界에 가까우면서도 예술형상에 밀착해 있다. 즉 意는 작가의 정신이며 象은 객관적 물상으로서의 산수경물이다. 그래서 의상은 작가의 정신이 산수경물과 결합하여 완성한 산수미의 구체성을 의미한다. 둘째, 의상은 산수미의 성격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의상은 산수미가 감각에 의해 발견되기보다는 정신에 의해 창작된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는 산수의 내용미에 주목하게 된다. 즉 작가는 산수경물을 통일되고 계열화된 미의 개념 속에서 가치를 지닌 형상물로 인식한다. 따라서 심미체험이나 가치관 등이 산수경물과의 相互交融에 의해 창작된 산수미는 가치로서의 美의 境界를 表象한다.


출처 : 손오규 (2006). 韓中 산수문학에서의 山水形象化. 한국시가연구, 21, 185 - 215.


산수미를 책에 넣고자 한다.



네번째 격자틀 인식 모형2 6화 공자-춘추전국시대 편에서 요산요수(樂山樂水)를 참고하여 속세로 나온 듯 초야에 묻힌 듯, 바쁜 듯 한가한 듯 자화상에 자연산수를 그리고자 한다고 적었다.


요산요수(樂山樂水)를 참고하여 속세로 나온 듯 초야에 묻힌 듯, 바쁜 듯 한가한 듯 산수미를 담아 자화상에 자연산수를 그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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