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주의자

귀스타베 쿠르베, "절망하는 남자"

by 룡하

(자화상을 보고 쓴 시입니다. 시와 자화상을 같이 보시길 바랍니다.)



무정부주의자


과학적 세계관과 합리주의

도태된 관념론과 전통주의


종교와 신화를 그리는

아카데미 회화법 대신


천사를 보여달라고 하며

평범한 사람들을 그렸네


파리코뮌의 실패 때문에

좌절했던 무정부주의자


꿈꾸던 이상이 물거품이 된 상황

절망해서 사실에만 집착했을까



귀스타브 쿠르베, 절망하는 남자, 1843∼1845년.


절망은 희망이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했거나,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절망감을 느낀다. 19세기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는 절망에 빠진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잘생긴 외모에 탁월한 재능까지 있었던 그는 무엇 때문에 절망했던 걸까.


쿠르베는 프랑스 오르낭의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스스로를 사회의 반항아로 여겼다. 스무 살 때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왔지만 국가에 구속되는 삶이 싫어 자유로운 예술가의 길을 택했다. 사회 문제에도 관심이 컸던 그는 농민이나 도시 하층민의 비참한 현실을 묘사한 작품으로 사실주의 미술의 선구자가 되었고, 훗날 파리코뮌에도 적극 가담했다.


이 그림은 24세 때 그린 것으로, 당시 무명이었던 쿠르베는 명성과 먹을 것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그림 속 화가는 헐렁한 흰 셔츠에 짙푸른 작업복을 걸친 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넘기고 있다. 놀란 듯, 분노한 듯 얼굴은 붉게 상기됐고, 두 눈은 관객을 향해 부릅뜨고 있다. 마치 “세상이 왜 이래?”라고 항변하는 듯하다. 국가 공식 전람회인 살롱전의 문턱은 그에게 너무도 높았다.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면서 보수적인 예술계 자체에 환멸을 느꼈지만, 그림을 포기할 순 없었다.


희망은 불현듯 찾아왔다. 절망의 자화상을 완성한 지 불과 4년 후 쿠르베는 인생 역작들을 탄생시켰다. 시골 장례식 풍경을 기록한 ‘오르낭의 매장’과 서민의 노동을 그린 ‘돌 깨는 사람들’이 살롱전에 전시되면서 그는 사실주의 미술의 대가가 되었다.


예술가로 승승장구한 뒤에도 위기와 좌절은 계속됐다. 아마도 그때마다 쿠르베는 절망했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견뎌냈던 듯하다. 파리코뮌의 실패로 스위스 망명길에 오를 때도 이 자화상은 챙겼고,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었다. 절망의 순간을 견딘 뒤 찾아왔던 희망의 기억. 그에겐 롤러코스터 같은 삶을 살아낸 힘이었을지도 모른다.


출처 : 이은화, "절망의 얼굴[이은화의 미술시간]〈136〉", 동아일보, 2020.11.12,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01112/103918227/1


종교와 신화. 미술계에서 자주 선택되는 주제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상상과 예술적 표현이 미술 존재의 이유이며 하나의 아카데적인 회화법으로 전해내려 왔다. 그런데 19세기 프랑스의 한 화가는 기존의 아카데미식 회화법을 뒤로 하고 ‘사실주의’라는 미술 사조를 일으켰다. 오늘 만인의 그림에서는 ‘천사를 보여주면 그리겠다.’라는 말로 유럽을 놀라게 한 화가 ‘쿠르베’의 그림을 소개한다.


인류는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오랜 기간 그려왔다. 재밌는 것은 기간으로 봤을 때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린 그림이 성행한 시기가 훨씬 길다는 점이다. 쿠르베가 태어난 1819년은 낭만주의 화풍이 대세였다. 이전 고전주의나 바로크, 로코코, 르네상스 등의 사조에서 대단히 과장된 신화 및 종교 묘사가 주였다면 낭만주의에서 다소 약화된 느낌이었다.


그토록 중세미술을 비판하며 등장한 낭만주의였지만, 여전히 화가들은 신과 귀족들을 그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와 악마를 그렸으며, 실제와 다른 왕과 귀족들의 멋진 모습들이 캔버스에 그려졌다. 서민들의 일상이나 현실에 대한 주제는 뒤로 밀려난 것이다.


쿠르베 또한 초기에는 낭만주의 화풍의 영향력을 많이 받았다. 프랑스 동부 오르낭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법률가가 되길 바란 아버지의 뜻과 달리 붓을 잡게 된 쿠르베는 20대가 되어 파리에 입성했다.


같은 낭만주의 화풍이었지만, 애초부터 사람들의 상상력과 감성을 자극하는 꿈이나 환상을 그리던 동료 화가들과는 다른 주제 선택이 쿠르베의 차별점이었다. 1844년 자신이 등장하는 첫 작품 ‘검은 개와 함께 있는 쿠르베’를 통해 프랑스 아카데미 미술의 인정을 받아 살롱전에 입상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으로 격동의 시기를 겪고 있던 프랑스 파리에서 쿠르베는 아카데미식 미술을 거부했다. 혁명의 흐름 속 쿠르베 또한 낭만주의를 버리고 새로운 화풍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남들이 위대한 인물에 집중할 때 그는 평범한 사람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1849년 작품 ‘돌 깨는 사람들’을 시작으로 '오르낭의 장례식' 등 지극히 평범한 서민들의 일상 혹은 죽음을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


당연히 미술계에서는 조롱섞인 목소리로 그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당신의 그림은 예술이 아니다"라는 공격과 함께 쿠르베에게 아카데미식 회화를 강요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쿠르베는 의기소침하기는커녕 오히려 뻔뻔해 보일 정도로 당당했다. 한 평론가와의 대화에서 그는 "나에게 천사를 보여 달라! 그러면 천사를 그리겠다."라고 말했다.


이 대답은 미술계에 큰 파장을 낳았다. 당시의 거대 담론과는 맞지 않았으며, 미술에 대한 쿠르베의 철학을 한 마디로 대변한 것이기 때문이다. 거센 반발에도 ‘현실을 그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쿠르베의 미술철학은 점점 관심을 받게 되었다. 이후 1885년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쿠르베는 '사실주의(Realism)'라는 용어를 사용해 많은 이들에게 전파했다. 그를 비판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비웃으면서 ‘사실주의의 탄생’을 알렸다.


출처 : 김태웅, "천사 보여주면 그리겠다! 사실주의 창시자 '쿠르베' - 윕뉴스", 윕뉴스, 2021.06.11, https://www.wip-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182


쿠르베가 눈앞에 보이는 사물 그대로를 그리고자 한 것은 그로서는 지극히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살롱전에서 최고의 장르로 인정받고 있던 역사화와 신화화는 모두 연출된 극적인 장면이었다.

따라서 1848년 2월 혁명을 통해 제2공화국을 성립시킨 세대로서 쿠르베와 같은 무정부주의자의 일련의 정치적인 경험, 즉 1852년 쿠데타에 의한 제2제정 선포로 체제가 과거로 회귀한 것은 거의 절망적이었다. 꿈꾸던 이상이 물거품이 된 상황에서 그들은 오로지 사실에만 집착하게 되었다.

한 가지 덧붙이면 당시는 과학의 시대로 과학적 세계관과 합리주의가 관념론과 전통주의를 도태시켰다. 따라서 주관보다는 객관성이 중요하고, 개성을 배제하며, 무감각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만이 유일하게 의미 있는 대상이었다. 이런 시대상을 온전히 담아 그리기 시작한 작가가 바로 쿠르베인 것이다.


“나는 쉰 살이고, 지금까지 자유롭게 살아왔다. 나는 삶을 자유롭게 마치고 싶다. 나는 죽어서 ‘그는 어떤 화파, 교회, 협회, 아카데미, 특히 자유 체제 이외에는 어떤 체제에도 속하지 않았다’라고 회자 되고자 한다.” 쿠르베의 회고이자 바람이었다.


출처 : 박춘호, "쿠르베 ‘시민자치’ 물거품 후 사실주의 추구", 의학신문, 2019.11.26, http://www.bos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16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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