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

폴 세잔, "팔레트를 든 자화상"

by 룡하

(자화상을 보고 쓴 시입니다. 시와 자화상을 같이 보시길 바랍니다.)



시지프


미술의 도시 파리를 정복했던

서양 추상회화의 창시자이자


오랜 친구의 소설 속

실패한 화가의 모델


시지프가 평생 굴려 올렸던 바윗돌처럼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든 팔레트


모든 단계의 색들이 있는

색 계열들을 둔 팔레트로


풍경화, 초상화, 정물화, 자화상

모든 주제의 그림을 그렸구나



▲팔레트를 든 자화상 1890년 뷔를레 컬렉션 스위스뷔를레 컬렉션 스위스 ⓒ 뷔를레 컬렉션 스위스


세잔의 삶은 특별한 사건이 없었던 굴곡 없던 삶이었습니다. 오직 그림 그리는 일에만 몰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족 관계, 친구 관계에서 독특한 단면이 드러납니다. 그의 부모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세잔을 낳았습니다.

세잔은 화가의 길을 가기로 목표를 정한 후, 파리와 그의 고향 엑스 앙 프로방스를 오가는 것을 반복합니다. 애인과의 사이에 아들을 낳았지만, 부모에게 오랜 기간 숨겼습니다. 엑스와 파리, 에스타크, 퐁투아즈,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오가며 가족과 이별과 재회를 거듭합니다. 이것은 모두 자신만의 회화 기법을 찾는 것에 몰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특이한 말투에 커다란 체구, 세련되지 않은 행동으로 친구가 거의 없었지만, 에밀 졸라와 카미유 피사로와는 특별한 교감을 나누었습니다. 졸라와는 어린 시절의 각별한 교우 관계 이후 평생의 친구라 할 만큼 깊고 오랜 교감과 친밀감을 나누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동급생에게 시달리는 졸라를 세잔이 보호하였고, 그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으로 졸라가 세잔에게 사과를 한 바구니 가져와 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세잔의 정물화와 다른 그림에 등장하는 사과에 대한 그의 집착이 그 이유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졸라와의 특별한 우정과 교감을 생각하면, 이러한 일화가 전하는 의미는 예사롭지 않아 보입니다.


세잔은 법학을 공부하길 바라는 아버지의 의지에 반하여 화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전통적인 살롱 전시회에 입상하려 시도하였으나 심각한 비난과 조소의 대상이 되었을 뿐입니다. 모네, 르노아르, 드가와 같은 인상파 화가와 교류하며 그들의 독립 전시회에도 참여하였지만, 그 역시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열정과 능력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으며, 전통을 뛰어넘겠다는 의지 역시 강력하였고, 비난이나 낙선 때문에 그의 열정과 의지를 접었던 일은 없었습니다.


세잔이 화가의 길로 들어서도록 이끌었고, 그가 자신의 능력에 대해 회의를 품거나 실의에 빠졌을 때 격려와 위로를 준 사람은 에밀 졸라였습니다. 피사로는 세잔의 초기 그림에 보였던 어둡고 음울한 색조에 빛과 색채를 가미할 수 있도록 조언하였습니다. 엄격한 아버지의 반대에 맞서 화가가 된 세잔에게 따뜻한 격려와 충고를 해 준 사람도 피사로였습니다. 세잔은 그가 신이자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습니다.


세잔은 풍경화, 초상화, 정물화, 자화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제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약 40년간 세잔은 900여 점의 유채화와 400여 점의 수채화를 남겼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은 잘라서 불태웠다고 합니다. 세잔은 스스로에게 엄격했으며, 자신에게 자주 가해지던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는 화가라는 비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출처 : 지봉근, ""그림 그리다 죽겠다"던 화가, 정말 그렇게 죽다", 오마이뉴스, 2019.07.25,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56722


세잔은 20세기 서양 추상회화 창시자


20세기 입체파의 거두 피카소는 “세잔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다”, “나의 하나뿐인 유일한 대가다”라고 했고, 야수파의 거두 마티스는 “세잔은 일종의 그림의 신이다”라고 했을 만큼 세잔은 20세기 서양 추상회화의 창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대에 이렇게 거장으로 추앙받는 세잔이지만 생전의 그는 생애 말년 약 10년을 제외하고는 대중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미술계 인사들의 혹평에 시달리며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심지어 그의 죽마고우인 소설가 에밀 졸라는 소설 ‘작품’에서 주인공 클로드 랑티에를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무능하고 실패한 화가로 묘사했는데, 그 모델은 다름 아닌 세잔이었다. 이 소설로 인해 졸라와 30년 우정은 파탄을 맞았다.


세잔은 살롱전과 인상파 전시에도 출품했으나 연이은 낙선과 혹평을 견디다 못해 1877년 “사과 한 알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다”라고 다짐하며 고향 엑상프로방스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1895년 쉰여섯 살에 파리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개최할 때까지 고향에 은둔하며 그림만 그렸다. 세잔은 매우 비사교적인 성격의 인물이었다. 일례로 그는 이사할 때 누구에게도 새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다. 게다가 첫 개인전을 열었음에도 오프닝에 참석하지 않고 고향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림을 그렸다.


출처 : 박춘호, "보이는 것을 넘어 주관적 느낌을 그렸다!". 의학신문, 2020.04.20, http://www.bos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25432


흔히 인류 역사를 바꾼 사과가 몇 개 있다고 말한다. 아담의 사과, 만유인력을 알려준 뉴턴의 사과, 그리고 스티브 잡스의 애플까지. 여기에 프랑스 화가 폴 세잔(1839~1906)이 그린 사과도 사과 역사 탁상에 올려도 될 듯하다.

세잔은 ‘사과 화가’로 불릴 정도로 사과를 40여 년 동안 줄곧 그렸다. 왜 사과에 천착했을까. 화가로서 사물에 대한 관찰력이 부족하다고 느낀 세잔은 사과를 오래 보며 그 변화를 그림에 담으려고 애썼다. 사과는 구하기 쉽고, 금방 썩지도 않기에 오랜 관찰 대상으로 좋았다. 그는 화실에 사과를 놓아두고 녹아서 문드러질 때까지 관찰하며 사과를 그렸다고 한다.

결국 세잔은 사과로 미술의 도시 파리를 정복했다. 그는 1893년 <사과 바구니>라는 작품을 통해 마치 여러 각도에서 사과를 바라보는 듯한 다관점 원근법(multiple perspectives)을 적용했는데, 이는 훗날 입체파, 야수파 미술 탄생에 기여했다.


출처 : 김철중, "당뇨병으로 고생한 '사과 화가'… 그린 만큼 먹었다면 건강했을까", 조선일보, 2024.03.18, https://www.chosun.com/culture-life/health/2022/07/28/SW6GRZJXQNGZLHBSJZPLYPNPEQ/


카뮈는 사회의 부조리에 직면한 사람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고민한다. 카뮈는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라는 파격적인 글로 그의 에세이「시지프 신화」를 시작한다. 그는 삶이 과연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독자와 그 자신에게 묻는다.


그러나 카뮈는 인간이 부조리에 맞서기 위해 자살을 택하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카뮈는 “산다는 것은, 부조리를 살려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조리한 인간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목표를 세우기보다 사회에 반항적이고 아이러니한 삶 자체에 집중한다. 부조리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사는 것 그 자체다.


그리스신화의 시지프는 카뮈가 제시하는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이다. 시지프는 계속해서 바윗돌을 산꼭대기로 굴려 올린다. 바윗돌은 다시 굴러 떨어지고, 시지프는 평생 동안 바윗돌을 산꼭대기에 굴려 올려야 하는 운명에 놓인다. 시지프의 노동은 부조리한 인간이 처한 상황이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그가 처한 상황을 극복하려고 하지만 시지프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겠다는 목표 없이 살아간다.


출처 : 전은지, "알베르 카뮈 탄생 100주년 “산다는 것은 부조리하다” - 이대학보", 이대학보, 2013.03.25, https://inews.ewha.ac.kr/news/articleView.html?idxno=17721


5. 색과 대상성


화가라면 누구나 색 사용에 커다란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특히 인상주의는 작업실 밖의 자연을 표현하기 위해 기존 회화와는 다르게 색을 사용한다. 인상주의는 빛과 대기 속의 사물을 표현하기 위해 어두운 색을 쓰지 않고 밝은 색을 사용한다. 즉 “팔레트에서 흙색, 오커색(황갈색 ocres), 검정색을 배제하고 단지 프리즘의 7가지 색만을 두어”55) 사용한다. 또한 인상주의는 국부 색(ton local), 즉 다른 대상과 구별되는 한 대상의 색에 만족하지 않고 대비 현상(phénomènes de contraste)을 고려한다. 특히 “거의 맹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보색(complèmentaires) 이론을 적용”56)한다. 예컨대 햇빛 속의 초록 풀잎을 생생히 표현하기 위해 초록색의 보색인 빨간색을 대비적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인상주의는 “색을 더 이상 섞지 않고, 계산하여 쪼갠 순수 색들을 갠버스에 바른다.”57) 즉 여러 색을 섞지 않고 순수한 색들을 점묘적으로 병치하여 하나의 국부 색을 표현한다. 이러한 색 사용으로 인상주의는 빛과 대기 속에 있는 사물의 인상을 표현하지만, 그렇게 “대기를 그리고 색조들을 쪼개는 것은 또한 대상을 [대기 속에] 빠트리고 대상의 고유한 무게감을 사라지게 한다.”58) 다시 말해 인상주의가 표현한 대상들의 윤곽은 대기와 빛 속에서 불분명한 채로 있다.

그러나 세잔은 인상주의와 다르게 색을 사용한다. 그의 “팔레트에는 6가지 붉은색, 3가지 푸른색, 5가지 노란색, 3가지 초록색, 1가지 검정색 등 18가지 색이 있다.”59) 세잔은 인상주의가 쓰지 않는 “[오커색과 같은] 따뜻한 색들뿐만 아니라 [어두운] 검정색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세잔이 대상을 재현하기를 원했고 대기 속에 있는 대상을 재발견하기를 원했다는 것을 보여준다.”60) 그리고 세잔은 인상주의처럼 색을 쪼개지 않는다. 그렇지만 “색을 혼합하여 작업하지 않았고, 모든 단계의 색들이 있는 색 계열들(gammes)을 팔레트에 두고”61) 작업하였다. 이렇게 단계적인 색들을 계열 별로 모아 사용하는 것은 세잔이 한 대상의 미묘한 색 변화를 연속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인상주의가 색들의 점묘적인 병치로 한 대상의 색을 나타냈다면, 세잔은 “한 대상이 형태에 따라 그리고 그 대상에 비친 빛에 따라 ‘변조’(module)되는 색 뉘앙스의 전개를”62) 누진적으로 표현하였다. 대상의 색을 쪼갠 “인상주의자들이 빛과 대기에 관심을 가진 채 한 대상의 고유색(우리가 회화에서 국부성(localité) 또는 국부 색이라 부른 한 대상의 고유색)을 인정하는 데 점점 동의하지 않는 반면, 세잔은 국부성의 색의 원리에 몰두하려고 점점 더 노력하였다.”63) 한 마디로 세잔은 따뜻하고 어두운 색으로 그리고 연속적이고 누진적인 색으로, 인상주의가 빛과 대기 속에서 잃어버린 대상을 복원하려고 했다.


55) E. Bernard, “La méthode de Paul Cézanne”, in op. cit., p.290; SNS, p.19. 이와 같은 인상주의의 색 사용은 베르나르의 설명에 따른 것이다. 그것은 또한 메를로-퐁티가 이해한 인상주의의 색 사용과 동일한 것이다. 아마도 메를로-퐁티는 인상주의의 색 사용에 대한 베르나르의 설명을 따른 것 같다. 또한 세잔의 색 사용에 대한 메를로-퐁티의 파악도 베르나르의 설명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세잔에 대한 메를로-퐁티의 미학적 해석은 베르나르 해석과 다소 차이가 있다.

56) E. Bernard, Ibid., p.292. SNS, p.20 참조.

57) E. Bernard, Ibid., p.290. SNS, p.20 참조.

58) SNS, p.20. E. Bernard, Ibid., p.290 참조.

59) E. Bernard, Ibid., p.294; SNS, p.20. 베르나르가 본 세잔의 팔레트 구성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간다. “노란색 계열: 밝은 노랑(Janune brillant), 네이플즈 옐로우(Janune de Naples), 크롬 옐로우(Janune de chrôme), 옐로우 오커(Ocre janune); 붉은색 계열: 주홍색(Vermillon), 레드 오커(Ocre rouge), 번트 시에나(Terre de Sienne brû lée), 로즈 매더(Laque de garance), 카민 레이크(Laque carminée fine), 번트 레이크(Laque brûlée); 초록색 계열: 베로니즈 그린(Vert véronèse), 에메랄드 그린(Vert émeraude), 테르 베르트(Terre verte); 파란색 계열: 코발트 블루(Bleu de coblat), 울트라 마린(Bleu d’outremer), 프러시안 블루(Bleu de prusse), 검정(Noir de pêche)”(E. Bernard, Souvenirs sur Paul Cézanne et lettres, Paris: la Rénovation Esthétique, 1921, pp.63-64) 마지막 검정색은 분류상 독립적으로 두어야 할 것을 파란색 계열에 둔 것 같다. 그리고 베르나르는 세잔이 18가지가 아니라 최소한 20가지 이상의 색을 쓰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세잔은 내가 전혀 사용하지 않는 색을 적어도 20가지는 요구했다.”(Ibid., p.35.)

60) SNS, p.20.

61) E. Bernard, Souvenirs sur Paul Cézanne et lettres, p.35.

62) E. Bernard, “La méthode de Paul Cézanne”, in op. cit., p.293. SNS, p.20 참조.

63) Ibid., pp.295-296.


출처 : 주성호. (2015). 세잔의 회화와 메를로-퐁티의 철학. 철학사상, 57, 26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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