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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시선

어느날 한통의 편지를 받는다. 둘

비 오는 날에, 당신께

by 김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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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한통의 편지를 받는다. 둘


- 비 오는 날에, 당신께 -


비가 옵니다.

창밖으로 흐르는 빗줄기, 그 소리가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립니다.

이렇게 계속 내리면, 어쩌면 우리 모두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는 게 이런 건가요?

의미 없는 것들을 붙잡고, 좌절하고, 슬퍼하다가

결국엔 아무것도 아닌 채로 흘러가는 것.


그건 우리의 길이 아니라고 믿고 싶어요.

하지만 가끔은 두려워져요.

늘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당신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아요.

색안경을 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당신을 보면 그 사람이 떠올라요.

말투도, 행동도, 얼굴도…

그냥 닮았어요. 어쩌면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제 마음이

당신을 그렇게 보게 만드는 걸지도 모르죠.


밤에는 편지를 쓰지 말라고 했죠.

아침에 보면 후회하니까.

하지만 오늘 밤은 예외예요.

비가 너무 많이 오거든요.

이런 밤엔 잊혀졌던 사람들을 생각하게 돼요.

그 사람도, 지금 이 순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잠 못 이루고 있을까요?


당신을 미워하지 않을게요.

그건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니까요.

하지만 사랑도 하지 않을래요.

그건 너무 슬프고, 너무 아프니까요.


그 사람은 죽었어요.

지난달에, 땅속 깊은 곳에 묻었어요.

그런데도 잊혀지지 않아요.

내 사랑이었거든요.

모든 걸 그 사람에게 배웠어요.

당신에게서 그 사람을 느꼈어요.

그래서 미안해요.


언젠가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땐 당신만을 느낄게요.

하지만 또다시 그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면

그땐 조용히 돌아설게요.


당신은 혼자 사는 사람 같아요.

아픈 미소 짓지 말아요.

당신에 대해 알고 싶은 건 없어요.

그저 이따금씩, 제 친구가 되어주세요.


요즘은 밤마다 편지를 써요.

하지만 보내진 않아요.

이 편지도, 아마 제 손 안에서 사라질지도 몰라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어요.

어둠뿐이었어요.

열한 시가 넘었네요.


전 좀 이상한 사람 같아요.

모자란 것 같기도 하고, 특별히 잘난 것 같기도 하고

그저 제 편한 것만 추구하며 살아왔어요.

그래서 이룰 수 없는 것들에 더 집착하는지도 몰라요.


전 권리도, 의무도 모두 잃어버렸어요.

누군가를 가두고 싶어 해요.

하지만 한 번도 내 안에 누군가를 철저히 가둬본 적은 없어요.


꿈속에 놀러 갈게요.

당신의 방에.

그럼 기타를 쳐주세요.

그 소리, 비와 함께 들려오면 좋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1987년 6월 8일


#이별 #사랑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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