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간 일상
책장 한편에 공책들이 가득했다. 낭비 아닌 낭비의 흔적이었다. 다이소나 핫트랙스에서 산 물건들로 저렴하게 할인하거나 좀 예뻐 보이면 '언젠가 쓰겠지'라는 생각으로 샀었다. 몇 장 쓰다 만 것도 있고 쓰지 않은 것도 많았다. 포장만 안 뜯었다면 주변에 나눠줄 수 있었을 텐데 하며 아쉬움이 들었다.
그중 한 권에 ‘독서노트’라 적힌 게 보였다. 좀 의아했던 건 전부 한글파일로 책 내용을 정리해서 공책에 남긴 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뭘 썼나 싶어 봤더니 그동안 읽은 책들의 문장을 필사한 노트였다.
예전부터 필사에 관심은 많았다. 다만 쓰는 게 너무 귀찮기도 했고, 한창 독서모임을 할 적 가볍게 남겨보자 싶어 적어둔 것들이었다. 코로나로 모임이 파하고 힘든 시기를 보내며 한동안 책을 안 봤더니 한 구석에 버려진 모양이었다.(난 힘들고 우울하면 책이 잘 안 읽힌다)
오랜만에 본 낯익은 책들이 눈에 보였다. 한 문장 한 문장 내게 울림을 주었던 말들이었다. 특히 내가 어떤 고민들을 했는지,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도 신기했다. 잊고 있던 내용들이 떠오르며 마치 잃어버린 문장을 찾은 기분이다. 뿐만 아니라 기억하고 있던 말들도 이렇게 활자로 보니 잃어버린 빛을 되찾은 듯 새롭게 다가왔다.
여백을 찾아 몇 자 적어봤다. 얼마 전에 읽었던 ‘생각이 많은 어른들을 위한 심리학’이었다. 문장 한 줄일 뿐이었는데 가득 차 보였다. 읽으며 느꼈던 감정과는 또 다른 감정이 펜 끝에서 피어났다.
과거엔 저 필사가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궁금했는데 지금 와서 이걸 읽으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앞으로도 종종 쓰면서 힘들 때마다 꺼내 봐야겠다.
그러고 보니 노래 가사도 필사하면 재밌을 것 같은데... 어째 취미가 점점 고상해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