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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댄 Dec 25. 2020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맛 하나는 깊게 다가온다

마이크 뉴얼 2018.

우리에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어요

폭풍이 지나간 후는 폭풍이 오기 전과 같지 않다. 평화로운 풍경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고름 냄새가 올라온다. 회복되지 않은 상처를 갖고 있는 한 우리는 여전히 폭풍 속이다.


영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년 영국 건지 섬을 배경으로 한다. 건지는 전쟁 당시 5년 여의 시간을 독일군에게 점령당했던 곳이었다. 주민들은 지뢰가 아직 다 정리되지 않은 섬에서 다시 일상을 일구기 시작한다. 상처에 골똘할 만큼 여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 당시 우연히 만들어진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회원들은 전쟁 이후에도 꾸준히 만남을 갖는다.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지는 않지만 그 주위를 어루만지며 통증을 경감시킨다. 이들은 얼마 안가 상처를 직면하게 된다. 런던에 사는 인기 작가 줄리엣 애슈턴(릴리 제임스)이 농부 도시 애덤스(미힐 하위스만)를 만나고자 이 섬을 찾으면서다.


북토크를 다니며 바쁜 나날을 보내던 인기 작가 줄리엣 애슈턴은 어느 날 건지에 살고 있는 농부 도시 애덤스(미힐 하위스만)의 편지를 받는다. 줄리엣이 예전에 헌책방에 판 책 <엘리아 수필 선집>을 인상 깊게 읽은 도시가 일종의 팬레터를 보낸 것. 그는 편지에 본인이 속해있는 ‘건지 감자껍질 파이 북클럽’이라는 문학회에 대해 소개한다. 그 북클럽은 인기 작가의 흥미를 끌 만큼 매력적인 비화를 가지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건지 주민들의 가축들을 군용 식량으로 강탈했다. 주민들은 육류를 전혀 먹을 수 없게 된 것. 그러던 중 독일군 몰래 돼지 한 마리를 숨겨둔 건지 섬의 농장주 어멀리아(퍼넬러피 윌턴)와, 그를 친어머니처럼 모시던 엘리자베스(제시카 브라운 핀들레이)가 아는 얼굴 몇 명을 모아 바비큐 파티를 제안한다. 주민들은 자신들이 나눌 수 있는 음식을 싸들고 어멀리아의 집을 찾는다. 이들은 푸짐한 음식은 물론 사람의 온기와 따뜻한 대화도 채우는 하루를 보낸다.


만찬을 즐긴 이들은 통금 시간을 넘겨 집에 돌아가던 도중 독일군 무리에게 붙잡힌다. 독일군은 “무슨 모임이냐”라며 추궁했다. 엘리자베스는 한 독일군의 재킷 주머니 속 미니북을 보고 “북클럽이다”라고 둘러댔고 독일군은 이름을 대라며 이들 일행을 압박해온다. 그때 일행 한 명이 자신이 준비한 요리 '감자껍질 파이'에 대해 언급하면서 졸지에 무리의 이름이 생겼다. 이름하야 ‘건지 감자껍질 파이 북클럽’이다. 정체성이 생겨버린 이들 무리는 진짜 책을 읽고 토론하는 북클럽을 운영한다. 서로의 취향을 매주 알아가는 깊은 인연이 된다.

넷플릭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줄리엣은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의 매력적인 탄생 비화를 소설로 옮기고자 한다. 그러나 북클럽 회원들을 실제로 만나고 이들의 처연한 연결고리와 상처를 알게 되면서 그는 출판을 포기한다. 대신 상처 주위를 맴돌고 있는 회원들이 상처를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사랑스러운 아이 킷의 엄마이자 북클럽의 창시자인 엘리자베스의 행방을 찾기로 한 것이다. 줄리엣은 작가 특유의 집요함으로 온 힘을 다해 엘리자베스를 찾는다. 약혼자 마크(글렌 파월)에게도 조사를 부탁한다. 엘리자베스에 의해 모인 사람들이었지만 북클럽 회원들은 암묵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피해왔다. 이들은 줄리엣을 통해 쓰라리지만 꼭 필요한 치료 과정을 겪어왔다고 볼 수 있다.


모든 관계가 그렇듯 줄리엣도 무조건적인 도움만 주지는 않는다. 그녀도 회원들의 회복을 돕는 과정을 통해 전쟁으로 부모를 여읜 자신의 상처 또한 위로받는다. 자주성도 찾는다. 영화 후반, 줄리엣은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차기작을 쓰는 게 아니라 본인이 쓰고 싶은 소재를 가지고 진심을 다해 집필하겠다고 다짐한다. 책 한 권으로 시작된 이 인연들에게는 은근한 책 냄새가 난다.

영화 자체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들다. 폭풍이 머물었던 자리에 대한 표현이 우직하게, 겹겹이 이뤄졌어야 했다. 밟고 있는 땅이 그러하듯 각자의 마음에도 군데군데 지뢰가 놓여 있을 북클럽 회원들. 그들의 서사를 살리는 데에도 아쉬움이 있다. 부모님의 유품인 유리구슬도 강렬한 등장에 비해 작품 진행에서 힘을 못 썼다. 책이 원작인 이 작품은 영화보다 드라마로 각색이 되는 편이 나았을 터다.


연애 감정을 그리는 데에도 서툴다. 줄리엣이 미국인 약혼자 마크와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예상은 싱겁게 맞아 들어간다. 마크는 줄리엣의 영혼보다는 외모를 사랑했으니까. 마크는 줄리엣의 작가로서의 길을 응원했지만 줄리엣이 쓰는 책, 줄리엣의 감정을 이해하려 들지는 않았다.  반면, 도시는 책을 통해 줄리엣의 팬이 됐다. 같은 영국인으로서 상처의 형태도 비슷하다. 비슷한 감성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 연결된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이 커지는 과정을 지나치게 생략했다. 이들이 불이 붙는 지점 또한 모호하다. 여러모로 투박한 작품이다.


그럼에도 나는 싫지 않다. 버터도 밀가루도 들어가지 않은 감자껍질파이 같은 이 영화가. 감자의 맛 하나만큼은 깊게 느껴지는 파이처럼 이 작품은 상처 받은 인간들의 연대, 그 하나만큼은 진심으로 전해온다. 전쟁의 상흔이 남은 영국 시골 마을 풍경을 구경하는 것도 재밌다. 주민들은 꿋꿋한 활기를 띤다. 기회가 된다면 드라마로 리메이크된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보고 싶을 정도. “아마도 책들은 귀소본능이 있어서 저마다 어울리는 독자를 찾아가는 모양이에요”라는 줄리엣의 대사는 영화에도 적용이 되나 보다.


이 영화가 한국에 있는 내게 닿았다.

어느 시시하고 외로운 크리스마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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