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처럼 지지고 볶으며 헤어질 뻔한 위기도 넘기며 4년간의 연애를 하며 마침내 결혼을 하였다.
1년 뒤 사랑하는 딸이 태어나고 연인에서 부부로 다시 한 가족의 스토리는 이어졌다. 어느덧 8년 차의 부부가 되었고 우리 딸은 유치원 우주반에서 가장 키가 큰 아이로 성장했다.
남편이자 가장으로 당연히 일을 했으며 수차례의 이직을 경험하였다. 남들이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안정된 직장이나 공무원,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물음표는 ‘과연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였다. 다른 말로는 꿈을 꾸며 살고 싶었고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과연 나는 잘하는 게 있기나 한 것인지 항상 고민이었다. 무엇 하나 진득하게 버티지 못하고 이루지 못하면서 나를 탓했고 목적 없는 살기 위한 직장을 다니며 돈을 얼마나 주는지 옆 회사보다 조금이라도 여기가 나은지 비교하며 위안을 삼았다. 그리고 마지막엔 항상 후회를 했다.
같은 직장을 다니던 유부남 선배는 말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다니는 거지!”
나는 이 말이 너무너무 싫었다.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다닌다면 다른 무언가에 미치도록 빠져서 지내야 위안이 될 텐데 그런 것도 아무것도 없이 억지로 평일 근무 후 주말에 가족과 나들이 간 후 다시 일요일 저녁에 한숨 쉬며 우울해지는 밤이 싫었다.
2018년 9월 늦은 여름의 끝자락을 보내고 새벽 일찍 처갓집으로 향했다.
첫날 감나무 방제를 위한 준비
“힘든 결정하고 잘 왔네.” 장모님, 장인어른과 인사드리고 작업복을 입고 감나무밭에 방제를 하러 출발했다. 그렇게 농사를 해보겠다고 시작한 처가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장모님께서 내게 설득을 많이 하셨다. 직장 생활보단 수입이나 처지가 나을 거라고..
아내가 쓰던 작은방 한 칸엔 컴퓨터 한 대와 책상 한 대, 내가 깔고 잘 매트리스와 이불 베개가 놓여있었다.
장모님과 땅콩 수확 후 담기
9월이라 땅콩을 해오고 다듬고 고구마도 캐면서 장인어른을 따라다녔다. 시골 출신이지만 농사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기에 모든 일은 새롭고 낯설기만 했다. 장인어른은 평생 쌀농사를 해오시고 오랫동안 감을 따서 곶감도 만들어 오셨다. 농촌 사람들이 꽤 비슷하듯이 집집마다 밭작물도 일부 하시며 사계절을 채우고 살아오셨다. 오전 10시경엔 일이 힘들던 그렇지 않던 쉬거나 새참을 먹었고 오후 3시쯤에도 그러했다. 아침엔 항상 6시 전후로 일어났고 하루는 일찍 시작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떤 하루가 예정돼있는지 나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처갓집이 있는 마을은 작은 동네였다. 논이 가장 많고 밭이 있고 마당엔 모두 감나무 1~2개는 있는 전형적인 농촌의 풍경이었다. 며칠 동안 마음이 너무 푸근해지며 회사 안에서 느끼던 말 못 할 답답함이 생각났다.
“그래 농부로 살아간다는 것도 나름대로 좋은 점이 있겠구나.”
장모님은 항상 좋은 정보나 의견이 있으면 내게 말씀하셨다. TV를 보다가 열심히 살거나 성공한 스토리가 나오면 추천해 주시고 주변에 농업 관련 법인회사나 배울만한 농장주가 있으면 연결해 주시려 애를 쓰셨다. 5분 거리에 있던 농업기술센터 홈페이지는 하루에 한 번씩 들어가 정보를 확인해 보라고 하시며 농업인 교육은 무엇이든 신청하여 듣고 교육시간도 이수하라고 알려 주셨다. 하루가 끝나면 항상 그날의 농업 일지를 작성하여 중요 사항을 기록하게 하여 내년 내후년의 비교 자료로 쓰라고 하셨다. 장인어른도 오랫동안 그렇게 해오고 계셨다.
음식 솜씨가 좋으신 장모님은 먹을거리에 항상 신경을 많이 쓰셨다. 평소 먹는 것에 목숨을 걸고 사명감을 가지고 음식을 하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아내에겐 미안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정말 많이 먹게 되었다. 계절별로 제철 음식과 직접 만든 손두부 청국장까지 라면 같은 음식은 1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였다. 한식을 좋아하는 나는 장모님 음식이 좋았다. 엄마가 손수 해주신 음식과 아주 비슷했으며 농촌이라 주변에서 쉽게 재료를 공수할 수 있었기에 항상 속을 든든히 할 수 있었다.
고추 따시는 장모님(반찬도 잘 만드신다)
장모님의 농사에 대한 설득에 처음엔 반대를 하였다.
한 번도 겪어보진 못했고 마음에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내의 반응도 미적지근했고 “과연 농사가 나와 잘 맞을까?” 하는 의구심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처남이 몇 년 전 농사를 하러 내려왔다가 2년 정도가 지난 후 다시 올라갔기에 자기 부모 밑에서 일을 배운다는 것도 쉽진 않겠구나 싶었다. 아무리 직계 가족이라도 마음이 맞지 않고 자기 적성에도 안 맞는다면 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 당시 점차 회사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나는 직장 생활이 맞지 않는 사람이란 결론을 내렸다. 성격의 모난 부분이 문제인가 싶어 적성검사와 성격 테스트를 해보기도 했고 남들은 잘만 다니는 회사생활 같은데 부족한 사회생활 탓인가 스스로 부족함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동안 한 가지는 점차 확실해졌다. 확실히 예민한 성격의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한다면 대화의 내용보다 그 사람의 말하는 억양, 말투, 분위기, 풍기는 감정에 더 반응하곤 했다. 남들보다 생각에 생각을 품는 습관도 있었다. 생각도 많고 감정적인 성격에 목소리도 크지 않은 나는 ‘조용한 사람’에 가까웠다. 다른 말로는 차분하거나 선택의 기로 앞에선 우유부단하고 잔정이 많은 여린 마음의 소유자였다.
학창 시절엔 말없이 앞자리에 앉아 조용히 공부만 하지만 성적은 좋지 않은 내성적이던 내가 지금은 발에 장화를 신고 장갑과 토시를 한 채 농약 이름이 적힌 모자를 쓰고 오토바이를 타고 논과 논이 이어진 농촌의 가을 풍경 속으로 내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