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안식처가 사라지지 않길 바라며
며칠 전 주말에 가족들과 함께 차를 운전해서 가는 길이었습니다.
7살 딸이 타고 있어서 심심할까 봐 동요 노래를 틀어주었는데 마침 '고향의 봄' 노래가 흘러나오더군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노래 가사말처럼 꽃 피는 산골에서 태어나 지금은 결혼도 했지만 부모님은 아직 그곳에 살고 계십니다.
모든 것이 불편하고 외진 산골마을은 점점 거주하시는 분이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어른'으로 계시던 분들이 이제는 모두 나이가 지긋해지시고 지병으로 혹은 이사를 가시거나 고령으로 인해 빈집이 되어가고 있다는 말을 어머님께 전해 들었거든요.
마을길 따라 올라가던 자두나무와 복숭아나무는 아직 그대로인데 사람들만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 적잖이 쓸쓸함이 마을 전체에 감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마을에는 8 가구만이 거주하고 계신데 그중 한집은 저희 부모님이 거주하고 계십니다.
제가 어릴 때 회사로 돈 벌 로 나가시면 할아버지 할머니와 사계절 뛰어놀며 자라온 터전이자 마음의 안식처인데 유령마을이 되어가는 거 같아 한번은 어머님께 이렇게 말해보았어요.
"엄마!"
"이번에 포도밭 사지 말고 차라리 그 돈으로 이사를 가는 게 어때?"
물론 어머니도 가고 싶어 하셨지만 이사보다는 밭을 사서 수확량을 늘리는 게 장기적으로 더 나을 듯하다며 말끝을 흐리셨습니다.
"너희들이나 좋은데 살면 되지."
"우린 이제 이사 가면 얼마나 좋은 데 가겠냐?"
대도시에서 산골짜기로 시집온 어머님은 시부모님을 모시고 현재 이곳 마을에서 꿋꿋이 살아오셨습니다.
작은 슈퍼를 가려해도 20분은 걸어가야 했던 외딴 산골마을에서 저는 어린 시절 항상 막내였습니다. 6~7명 되는 형 누나들 사이에서 함께 놀면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이 마을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아왔기에 보잘것없는 마을의 고령화 현상을 목도하는 것이 지금은 마음속의 큰 슬픔으로 남았습니다.
고등학교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터덜터덜 걸어오면 가로등 하나 없어 깜깜한 시골길 위엔 별들만이 길을 비춰주었고, 뒤돌아 보지 못하는 무서움보다는 자연 속에 살고 있는 포근한 감수성을 배우며 살아왔습니다. 겨울에 무릎까지 소복이 눈이 쌓여 차가 다니지 못할 때에도, 서울에서 내려온 사촌누나 입에서 말끝마다 '시골'이라는 표현에 혼자 어색해하면서도 고향은 역시 고향이었습니다.
학교 기숙사나 자취를 하고 군대를 가는 등 부모님과 떨어지고 나서 다시 찾아갈 때도 마을의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하나 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작은 가로등이 생기고 비포장 도로에 시멘트 길이 생겨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부모님에 대한 걱정도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죠.
30년이 넘은 양옥집은 곳곳에 금이가고 마당 한편에 풀이 무성하게 자랄 때면 외딴 섬마을에 두 분 이서만 계시는 거 같아 알 수 없는 외로움이 피부로 느껴지곤 해서 계속 이사를 권유드렸습니다. 지금도 오늘 밤도 나의 고향집은 깜깜한 마을 한편에서 오롯이 불을 밝히고 tv소리만 정적을 깨뜨리며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겠죠. 깊은 마음속 안식처로 남은 산아래 내 고향에도 이번 겨울은 얼음처럼 차가운 정적이 짙게 드리울 것이라 생각됩니다.
어른이 될수록 부모님을 찾아뵙고 마을을 뒤로하며 차를 몰아갈 때면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스쳐가는 마을의 가냘픈 풍경들이 자꾸만 발목을 잡고 가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몸은 떠나 있지만 추억 속에 떠나지 못하고 있구나 하며 부모님에게 전화를 다시 걸곤 했습니다.
과거로 돌아갈 순 없지만 어린 시절 마음껏 뛰어놀며 부모님과 살았던 내 고향 산골마을에도 다시 봄이 찾아오길 바라며.. 사라지지 않길 기도하며
그때가 그립습니다.
영영 집을 떠난 마을 분들의 얼굴과 목소리가 사무치게 보고 싶습니다.
고향의 봄노래를 차 안에서 들으며 저도 모르게 흥얼거렸습니다.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