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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래오 Jun 14. 2020

최고의 김밥을 먹는방법

밖에서 먹으면 뭐든 맛있더라

"오빠 우리 주말에 피크닉 갈래?"


 외국인 아내의 입에서 나온 말 중 무척 반가운 말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찬밥에 김치 하나만 달랑 싸들고 괜히 산이나 물가에서 밥을 먹고 오곤 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이 모두 그랬다. 특별히 멀리 여행을 가지 못해도 가까운 곳에 가서 이런 외식(?)을 하며 여행 가는 기분을 내곤 했다. 정말 딱 찬밥과 김치만 가지고 가도 살랑살랑 불어오는 강바람과 가슴속까지 청소가 되는 듯한 느낌의 상쾌한 산속의 공기가 어우러지면 찬밥과 김치도 최고의 식사로 만들어준다.



 그렇지만 외국인 아내는 밖에서 불편하게 먹는 식사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결혼을 하기 전 연애를 할 때 이런 점이 조금은 아쉬웠지만 나이가 들수록 편한 게 좋아졌던 나 역시 밥은 편하게 먹자라는 생각이 뇌를 지배하고 있던 참이어서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좀 더 다양한 데이트를 갈망했던 나에게 아내의 입에서 나온 '피크닉 갈래?'라는 말은 마치 작은 오아시스 같았다. 그 말이 나오자마자 나는 요리사답게 바로 도시락 메뉴를 떠올렸다. 쏟아지는 햇살을 적당히 막아주는 초록의 나무 아래서 먹는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지 알려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내는 음식을 가져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선택한 메뉴는 피크닉 메뉴의 정석, 피크닉과 혼연일체, 피크닉이 연필이라면 이것은 종이라고 할 수 있는 바로바로 김밥이었다. 빵에 익숙한 아내를 위해 샌드위치를 준비할 수도 있었지만 나 역시 김밥을 워낙 좋아했고, 요리사로서 한식의 세계화에 앞장서야겠다는 마음 때문에 김밥으로 손쉽게 기울었다. 혼자서 신이나 재료를 사고 잠자리에 들기 전 재료 손질을 완벽하게 해 놓은 후 밥솥에 예약 버튼을 누르고 잠이 들었다. 주방에서 일을 하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왜 요리라는 길을 선택했을까 후회하지만 이럴 때 보면 적성에 딱 맞는 직업을 선택한 것 같기도 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가장 먼저 밥솥을 열어봤다. 취사가 완료되자마자 제대로 섞어주지 않아 솥의 바닥 쪽이 고두밥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믿거나 말거나 고두밥을 만들기 위해 100% 의도했던 과정이다.


 오늘의 나의 김밥 재료는 김, 밥, 단무지, 햄, 당근, 계란, 어묵 그리고 오이였다. 날씨가 더워져서 시금치의 맛이 없는 이유도 있지만 아내가 오이를 중독 수준으로 좋아했기 때문에 큰 고민 없이 김밥의 초록 부분은 오이가 담당하기로 했다. 김밥은 입에 들어가면 전부 섞여서 재료 하나하나의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것 같지만 재료 하나하나의 조리를 조금 소홀히 하면 신기하게도 김밥 맛의 밸런스가 무너져버린다. 그래서 아내에게 처음 선보이는 수제 김밥이기 때문에 재료 하나하나에 신경을 썼다.




 먼저 밥은 적당히 고들고들한 밥에 쉽게 녹아들 수 있게 가는 맛소금을 넣어준다. 나만의 레시피는 다른 재료에 간을 세게 하지 않을 거라 밥이 짭짤하다는 느낌이 들도록 소금을 넣어준다. 그리고 참기름 약간.


김밥용 단무지는 짠맛과 잡내가 빠질 수 있도록 맑은 물에 담가 두기만 하면 준비 완료!

햄과 당근은 물에 살짝 데쳐도 좋지만 프라이팬에 기름을 살짝 두르고 볶아준다. 당근에도 따로 간을 하지 않고, 오독오독 씹히는 맛이 살아있도록 살짝만 볶아준다.

 그리고 계란에 파를 송송 썰어 잘 섞어준다. 나만의 김밥 레시피에서는 계란지단에도 소금은 제외하고 후추만 살짝 뿌려 두껍게 익혀준다. 하지만 어묵은 약간의 간장과 설탕을 이용해 달짝지근하게 졸여주는 것이 포인트다. 약간의 짭짤함보다 달콤함이 좀 더 부각되어야 김밥에 어울리는 어묵조림이 된다.

 마지막으로 오이는 길쭉하게 썰어 소금을 살짝 뿌려 물기를 제거해준다. 오이는 머금고 있는 수분이 많아 김밥을 빠르게 눅눅하게 만든다. 바로 먹는 김밥이 아니라면 오이를 채 써는 것보다 길고 두껍게 썰어 물기를 제거해주는 것이 좋다.


 모든 속재료가 완성이 되면 가장 어려운 관문인 김밥말기. 잘 ~ 말아줘 잘 ~ 눌러줘. 옆구리 터져버린 저 김밥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유의해야 할 점은 밥의 양! 맛있는 김밥을 위해 밥은 최대한 얇게 그리고 넓게 펴준다. 밥을 최대한 김 끄트머리까지 펴 줄 수 있다면 이쁜 김밥을 만들 가능성이 높아진다. 단무지, 계란, 어묵, 오이를 순서대로 놓고, 위에 채 썬 당근을 듬뿍 올려 잘~ 말아준다. 김발을 이용하면 좀 더 균일하게 말아줄 수 있지만 음식은 역시 손맛! 깨끗한 맨손으로 말아줘도 충분히 맛이 있다.


 피곤한지도 모르고 열심히 준비한 김밥과 후식으로 포도까지 가방 안에 있다는 말은 도착할 때까지 하지 않았다. 배는 고프지 않으니 그저 마실 물이나 하나 사자는 말을 무심하게 던지고 피크닉 장소로 향했다. 그곳은 상상했던 날씨 그대로였다. 쏟아지는 햇살을 적당히 막아주는 나무 그늘도 있었고, 돗자리를 깔고 앉으면 푹신푹신 쿠션 역할을 해줄 정도로 자란 잔디까지 완벽했다.


 

특별한 것을 하지 않고 그저 돗자리에 누워 음악을 들으며 하늘 한번, 초록의 잔디 한번 그리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아내의 입에서 배고프다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여유로운 피크닉을 즐기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사진 찍고, 대화하다 보니 아내에게서 배고프다는 말이 나왔고 나는 아무런 말없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가방을 열었다. 같이 김밥을 사 먹어본 적은 있었지만 직접 실력을 뽐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그리 이쁘게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한국요리를 깊게 알지 못하는 아내에게 수준 높은 김밥이라 속이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시장이 훌륭한 반찬이고, 아름다운 풍경이 최고의 식당이었다. 그날의 김밥이 설령 맛이 없었더라도 우리는 무조건 최고의 김밥을 먹었을 것이다. 돗자리 위에서 처음 김밥을 맛본 아내의 표정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후로도 아내는 산이나 물에 놀러 갈 때 종종 도시락을 만들어 가자는 말을 한다. 작은 변화지만 서로에게 익숙해져가고 있다는 증거겠지? 아내에겐 다소 어려운 일인 나의 추억을 함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도시락을 만들었고, 아내는 그런 나의 의도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우리 사이의 간격은 다른 부부들보다 좀 더 멀게 시작했지만 지금은 더욱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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