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아버지의 직업이 조금은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친구 아빠들처럼 양복을 입지 않아서나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거나 하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고물상' 또는 '고물장사'라고 부르는 친구들이 있어서였다. 아버지의 직업 자체가 부끄럽거나 모습이 창피한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그냥 고물, 고물장사 같은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싫었다. 하지만 고물장사를 하는 아버지 덕분에 어릴 적 나는 넓은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 수 있었다. 마당에 쌓여있는 모든 것들이 놀이거리였지만 그중에서 내가 특히 좋아하던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발목보다 조금 높게 시멘트로 사방을 올려 만든 수돗가였다. 10살 남짓 어린아이에게도 한걸음을 채 내딛지 못할 정도 작은 공간이었지만 그곳은 나에게 특별한 곳이었다. 수돗가에서 가족 모두가 들러붙어 자주 하던 일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가장 좋아했다.
고물상이었던 마당의 뒷 대문을 나가면 바로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 깊지도 않았고, 산속의 계곡물처럼 엄청 맑지도 않았지만 물놀이를 할 수 있을 만큼은 깨끗했다. 나는 시간만 나면 다리 밑 냇가로 가서 발을 담그거나 물놀이를 했다. 다리 덕분에 그늘이 생겨 시원하게 쉬기에 좋았다. 특히 여름에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물가로 나갔다. 옷이 다 젖은 채로 집으로 가면 어머니의 잔소리가 있을 걸 예상하면서도 가끔은 나 자신을 제어하지 못했다. 시원하게 발만 담그면 좋았겠지만 어린 촌놈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양심은 있는지 바로 물에 들어가지는 않고, 허리를 푹 숙이고 돌덩어리에 붙은 고동을 한 두 개씩 줍기 시작한다. 아무런 요령도 없이 돌을 들추고, 모래를 뒤적거려 물만 뿌옇게 만들어 버렸다. 몇 개 줍지도 못한 나는 자리 탓을 하며 여기저기 실속 없는 이동을 했다. 그러던 중 물이끼가 잔뜩 낀 돌 하나를 밟고 미끄러져 온 몸이 젖어 버렸다. 이 때다 싶어 흐르는 물살에 몸을 맡기고 본격적으로 머리까지 넣고 자맥질을 시작했다.
흠뻑 젖은 몸을 이끌고 어머니의 잔소리에서 벗어날 방법을 고민하며 집으로 향했다. 도착한 집에는 나를 구해줄 구세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누군가의 부탁을 받거나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집 앞으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 투망을 던져 몇십 분 만에물고기 수십 마리를 잡는 아버지의 기술은 동네에서 으뜸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런 말없이 턱을 치켜든 아버지의 의중을 단번에 이해한 나는 물고기를 담을 수 있는 물통을 들고, 투망을 둘러맨 아버지의 뒤를 냉큼 따라나섰다. 나는 물고기를 잡는 기술은 전혀 없었지만 아빠 뒤를 따라다니며 투망에 걸린 물고기를 빼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고 좋아했다. 그땐 무슨 체력이 있었는지 커다란 물통에 물을 가득 담고 잡힌 물고기까지 신나게 채워 넣으며 따라다녔다.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물통에는 종류도 크기도 다양한 물고기가 가득 찼다. 피래미, 꺽지, 망태, 모래무지 등 이름도 여러 가지였는데 아버지는 모든 물고기의 종류를 아는 물고기 박사처럼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항상 비슷한 어종의 물고기들만 잡혀서 그런지 나도 금세 대부분의 물고기들을 구분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물고기를 잡는데 도사였지만 과하게 잡는 법이 없었다. 항상 필요한 만큼만 잡고 돌아갔다. 그래서 엄청난 양이 아니면 물고기를 잡는 시간은 보통 1시간 이상 걸리지 않았다. 필요한 물고기를 잡고 아버지와 나는 허리를 숙여 고동을 줍기 시작했다. 아까는 자리 탓을 하며 몇 개 줍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면 나도 많이 주울 수 있었다. 예상보다 많이 주운 고동을 담아둘 곳은 따로 갖고 오지 않아 젖은 양말에 고동을 한가득 담아 집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물고기 한통 가득, 양말에 고동 한가득을 잡아오면 나의 아지트 수돗가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업이 시작된다. 고동은 맑은 물에 담아 해감을 하고, 물고기는 하나하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손질해준다. 어린아이가 보기에 징그러울 수 있는 작업이지만 나는 그 장면이 흥미로워 항상 자리를 지키고 바라봤다. 개중에 큰 물고기에서 터지지 않은 체로 나온 부레를 가지고 놀기도 했다. 징그러워하지 않고 물고기를 보고 만지던 그때부터 요리사의 자질이 조금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가 아버지의 몫이었다. 그다음은 어머니가 실력을 발휘할 차례였다. 어머니는 훗날 어탕을 파는 식당을 운영할 정도로 손맛이 좋으셨던 사람이다. 손질한 물고기의 일부는 소분해서 냉동실에 얼려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그땐 너무 쉽게 물고기를 잡던 아버지 때문에 흔한 것인지 알았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물고기를 잡아오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셨는데 아마도 손질이 번거로웠기 때문이었을 거다.
마당이 넓은 집은 여기서 또 장점을 보여준다. 수돗가 옆에는 호박, 깻잎 등 이것저것을 심어놓은 작은 텃밭이 있었다. 그날의 메뉴는 잡아온 물고기로 어탕을 만들고, 해감한 고동으로는 시원한 국을 만드는 것이었다. 텃밭의 재료 중에는 호박잎과 깻잎이 몇 장 필요했다. 부엌의 뒷문과 텃밭은 이어져있었는데 부엌에 있는 어머니의 요청에 따라 나는 호박잎과 깻잎을 따서 수돗가에서 세척까지 마친 후 뒷문으로 건네주었다.
어머니가 어탕을 만드는 방법은 이러하다. 먼저 내장을 꺼낸 물고기들을 푹 삶아준다. 삶아진 물고기는 소쿠리에 담에 뼈와 살을 분리해준다. 잡아온 물고기가 그리 크지 않아 잔가시를 골라내는 일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믹서기에 갈아서 쓸 수도 있지만 그 맛의 차이는 크기 때문에 어머니는 한 번도 믹서기에 갈지 않았다.
발라낸 물고기의 살점과 우거지나 시래기 등 채소를 넣고, 된장을 살짝 풀어준 뒤 푹 끓여준다. 텃밭에서 따온 깻잎과 마늘, 대파, 고춧가루 등을 넣고 마무리해주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수제인 어탕이 완성된다.
완성된 어탕에 제피라고 불리는 가루를 조금 넣어서 먹으면 민물고기 특유의 비린내가 줄어들지만 나는 제피가루의 냄새보다 차라리 비린내가 견디기 수월했다.
또 해감해놓은 고동에 마늘, 청양고추, 호박잎을 듬성듬성 잘라 넣어 한소끔 끓여내면 오묘한 초록 빛깔의 고동국이 완성된다. 고동국은 차갑게 먹는 게 제맛이라 저번에 만들어 둔 고동국을 꺼내고 새로 만든 고동국을 냉장고에 넣어둔다. 고동은 이쑤시개로 돌돌 돌려가며 살점을 빼먹는 재미도 있지만 끝부분을 앞니로 깨서 쪽 빨면 작지만 오동통한 살점이 딸려온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민물고기로 만든 어탕을 그리 즐겨먹지 않는다. 그냥 먹으면 민물고기 특유의 비린내가 거슬리고 비린내를 없애려 제피가루를 넣으면 제피의 강한 향도 견디기 힘들다. 시원한 고동국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즐겨 먹었지만 애써 찾아서 먹을 정도는 아니다. 시간이 지나 이런 향토음식들이 그리울 나이가 되었고, 요리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어머니의 어탕이나 고동국 맛을 낼 수 있지만 여전히 이 음식들을 즐기지 못한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어탕의 맛이 그리워지진 않았지만 투망을 둘러매고 집을 나서는 아버지의 뒤꽁무니를 다시 따라가고 싶어 졌다. 이제는 더 커진 내가 앞장서야겠지만 뒤따르던 그때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때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물고기를 잔뜩 잡아가면 수돗가가 없는 집이라도 어머니가 반갑게 맞이해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