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지를 입어본 적이 거의 없다.
중·고등학교 체육 시간과 교련 시간 정도가 전부다.
굳이 치마만 고집했던 건 아니다. 다만 ‘이제는 바지를 입어야지’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고등학교 때는 요일을 정해 ‘치마 입는 날’이
따로 있었지만,
늘 치마만 입어왔던 나에게 그 규칙은 나와 무관한 이야기였다. 치마를 입지 않고 등교한 친구들은
치마를 안 입어도 되는 옆 반에서 치마를 빌려 입고 검사를 받거나 미리 치마를 학교에 두고 다니기도 했는데 그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다.
성인이 되어서도 나는 줄곧 치마를 입고 다녔다. 계절을 가리지 않았다. 엄동설한의 한겨울에도 스타킹 하나에 치마를 입고 다녔고, 그때는
춥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닮아 근육형이며 어깨가 넓었고,
어머니를 닮아 다리가 가느다랬다.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어깨가 넓어 역삼각형의 몸이었던 나는
옷 입기 애매한 몸이기도 했다.
어릴 땐 어머니께서 바지를 입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고, 성장해서는 습관처럼 치마가 편해서 입었다. 친구들은 다리를 뽐내려고 치마만 입는다며 질투를 하기도 했지만, 치마를 입는 것이 굳이 몸매를 드러내기 위해서였던 건 아니다. 오히려 치마는 내가 가진 넓은 어깨와 각진 상체를 조용히 가려주는 역할을 했다.
치마는 나를 꾸미는 옷이라기보다 나를 숨겨주는 옷에 가까웠다.
'시선 분산?' 이런 작용도 있었을 테니까.
스무 살부터는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게 내 모습이었다. 그러다 최근 어느 날, 하이힐을 벗는 순간 발에 쥐가 나 한참을 주물러야 했다. 그 이후로도 종일 하이힐을 신고 다니다 집에 들어와 구두를 벗을 때면 어김없이 발가락에 쥐가 났다. ‘이제는 하이힐을 벗고 운동화를 신어야 하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던 내게, 나보다 연배가 있는 지인들은 말했다. 하이힐에서 내려오면 늙는 거라고, 조금 더 신고 다니라고.
자신들은 하이힐은 잘 안 신고 다녀서
이제는 신을 엄두도 못 내지만 보기 좋다고.
그러나 나는 건강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운동화를 신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바지도 입어보게 되었다. 운동화에 스커트는 왠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바지와 운동화를 선택했다. 그 조합은 생각보다 편했고, 생각보다 나와 잘 어울렸다. 다행인 건 키는 160cm가 되지 않았지만 허리가 짧아 바지를 입으니
다리가 길어 보이는 역할을 했다.
착시현상이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2~30대 때 이걸 알았다면 그 시절 바지도 입으며 지냈을 텐데.
가끔 중요한 자리에 스커트를 입고 가려고 거울 앞에 서면, 어쩐지 초라하고 어색한 내가 서 있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결국 바지로 갈아입고
다시 거울을 본다.
이제는 거울 앞에서 망설이는 시간이 줄었다. 스커트가 주는 긴장감 대신 바지가 주는 해방감을 선택하기로 했으니까. 하이힐에서 내려오면 어색할 줄 알았는데, 운동화를 신고 딛는 세상은 오히려 더 편하고 안전하다.
나는 오늘도 바지를 입고, 내 몸이 기억하는 가장 건강한 발걸음으로 집을 나선다. 쥐가 나던 고통을 견디며 서 있던 어제의 나를 뒤로하고, 이제야 비로소 진짜 경쾌한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바지를 입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이제는 치마보다 바지를 더 많이 입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