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몇 년 전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이야기이다.
어머니는 큰 아들과 사셨었고,
나는 큰집과 같은 동네이면서 큰집에서 개울만 건너면 보이는 곳에 살았다.
어머니는 잘하는 것도 없는 나를 이뻐하셨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대답만 '네. 네' 하는
열여덟 살 애 같다면서 챙기셨었다.
동네에 약장수가 들어와 마을회관이나 식당에 모셔놓고 선전을 하는 날이면 꼭 무언가를 사 오셨고 형님은 돈도 없으시면서 쓸데없는 것들 사들인다고 볼멘소리를 하곤 했었다.
어느 날인가도 1인용 전기방석을 사다가 '남의 새끼 키우느라 힘든데 방석 가져가서
일 할 때 깔고 앉아라'시며 몰래 주셨고
(그 시절 나는 어린이집 교사였다)
어떤 날은 돌솥이나 양념통 세트, 이쁜 간장종지 그런 것들도 사 오셨다 그리고는 형님 몰래 감춰 놓았다가 주시곤 했다.
형님이 알게 돼서 내가 미움을 받은 적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막내며느리가 좋다고 하셨다.
어느 날, 어머니가 치매증상이 생겼고 형님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커져갔다.
자식이 육 남매나 되는데 왜 큰며느리만 고생하냐며 어머니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날도 있었다.
형님은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막내 며느리랑 살라며 큰소리를 냈고 어머니는 정말로 나와 살고 싶다고 하셨다.
단, 우리 집에 살되 옆에 작은 집을 지어 달라고 하셨다.
남편은 조립식 집을 급하게 지었고 우리 집과
나무 마루로 연결해 맨발로도 오갈 수 있도록
예쁜 집을 지어드렸다.
천정도 유리로 덮어 비가 오면 빗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볼 수 있도록 신경 써서 집을 지었다.
어머니께서 우리 집으로 오신 지 몇 달 안 됐을 무렵 간병인으로 오랜 세월 일해온 큰 시누이가 간병 일을 그만두고 어머니를 모실테니 월급을 달라셨고 내가 모시게 됐는데 무슨 황당한 상황인가 했지만 딸이니까 직장 다니는 나보다는 낫겠지 싶었고,
자식들은 돈을 모아 매 달 몇백만 원씩을 드렸다
그런데 어린이집에서 퇴근하다가 형님이 어머니께
소리 지르는 걸 듣게 되었다.
그 후로도 아무도 없을 때면 자주 큰소리가 났고,
하필이면 불의를 보면 못 참는 내가 늘 그런 광경을 보고 듣게 되었다.
딸이 엄마를 대하는 모습에 나는 충격을 받았고
어머니는 내가 모실테니 가시라고 했다.
그런데 병원에 상주하며 간병일을 해온 시누이가
갈 곳이 없었는지 나가지를 않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어머니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기에 우리 집으로 침대를 옮기게 되었고,
새로 지은 집은 시누이가 점령하게 되었다.
나는 사실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게 싫었다.
치매가 심하지는 않았지만 치매가 시작된 어머니를 모신 다는 건 형님 집에 다니러 갈 때
뵙는 어머니가 아니고 날마다 같이 살고 돌봐드려야 하는 어머니였기에 부담스러웠다.
무엇보다 치매가 점점 악화될 거라는 걸 알기에 무서웠다,
나는 외동딸로 태어나 아버지께서 셋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조부모님들과도 집안 행사 때만 찾아뵈어서
살아오면서 내 주변에 가까운 어른은 부모님이 전부였다. 그래서 시부모님도 손님처럼 대하는 수준이었고, 살갑게 다정한 말도 어색해서 잘 못하는 바보였다.
그런 나를 어머니는 왜 좋아하신 건지 아직도 모르겠고 죄송스럽다.
결국 어머니는 막내인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고,
치매도 조금씩 심해져 갔다.
어느 하루
씻고 나왔더니 어머니가 실종되셨다.
가슴이 쿵쾅쿵쾅
새벽에 혼자 밖에 나가셔서 경사가 심하고 낭떨어지 같은 논두렁에서 넘어지셔서
아침이 올 때까지 빠져계신 적이 있었다.
직업병으로 어깨 회전근개 파열이 생겨 한쪽 어깨는 힘이 안 들어가는 내가 혼자 논에 빠진 어머니를 꺼내느라 고생한 적이 있었기에
또 사라진 어머니를 어디서 찾나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집 밖 현관 앞에 서 계셨었다.
어떤 날은 콩 심어야 한다며 호미를 들고 서서 콩이 어디 있냐고 물으시기도 하셨다.
새벽마다 사라지셔서 문을 잠궈 놓았는데
문을 열고 방충망이 안 열리자 방충망을 다 뜯어서 뚫고 나가셔서 애완견도 탈출을 했다.
치매가 이렇게 심해지고 있구나-
어머니가 오늘은 온전한 정신이신 듯하다.
현관 뜰에 앉아서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하신다.
'꽃같이 이쁠 땐 죽어라 일만 했어.
젊음은 눈 한번 끔뻑하니 사라지고 산 송장만 남아서 죽어지지도 않는다 얘' 하며 웃으셨다.
어머니 뵈면 가슴이 너무 아팠다~
대상포진 후유증으로 밤부터 새벽까지 데굴데굴 구르며 통곡을 하시던적도 있는 어머니.
안쓰러운 마음에 같이 울었는데, 새벽에 사라져
현관 앞에 앉아 기억이 돌아왔는지 속내를
이야기하신다
어릴 땐 집에 하녀도 있고 귀하게 자라셨다고 들었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한 번도 안 해본
한복을 짓고 화롯불로 다림질을 하고,
논, 밭에서 소처럼 일만 하다 보니
한 세월이 다 가버렸다고 한숨을 쉬신다.
이제 그 한숨 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
'상민 에미가 해준 밥이 제일 맛있다'던 어머니가
그립다. 바람 부는 11월이 오면 생각한다.
어머니의 목소리, 주름진 손등, 두꺼워져서 들떠있는 발톱.
그리고 어머니 등 뒤로 지나간 계절들을."
어머니와 함께한 시절이 있어서
감사했어요 어머니.
대. 소변 처리하고 씻기는것 때문에 처음엔 남모르게 울기도 많이 했지만 그것도 제가 해드리지 못했다면 평생 후회스러운 날들이었을 거예요.
어머니와 끌어안고, 웃고, 알콩달콩 살수 있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드려요.
부족한 며느리 이쁘게 봐주신 어머니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