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색이 있다면 나는 무채색일 거라 생각했다. 그림을 꽤 오래 그렸는데 가장 좋아하는 색이 울트라 마린이었다. 밝은 파란색도 하늘색도 아니고 깊은 수면 밑에 있는 듯한 색이다. 클래식 블루보다 어둡고 채도 높고 형광빛이 나는 색. 파랗고 또 파란 느낌. 입시를 하면서 주야장천 무채색을 만들기 위해 쓰던 색인데 뭐가 그리 좋았는지 모르겠다. 블루 그레이 추상화를 즐겨 그렸다. 행복이 파랑이라면 인생이 파랑일 수만은 없으니까 그레이를 섞어주면 적절하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우울은 내게 뗄 수 없는 존재였고 그렇게 블루와 그레이로 만든 색은 다시 무채색에 가까워졌다. 희미한 인생에 가까워졌을지도.
무채색의 마음을 지니고 긴 시간 살다 졸업 전시를 준비하며 잠깐 상담을 받았다. 우울하지 않은 내가 상상이 되지 않아요. 내가 말했다. 상담사는 우울과 함께 살아도 된다고 했다. 우울은 나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요즘은 다시 상담을 받으려 한다. 작은 일에 죽고 싶어 하는 내가 힘들다. 우울과 뺨을 맞대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싶다. 요즘은 공황 장애 약을 먹고 있고 글을 쓰고 책을 본다. 일주일에 한 번은 친구를 만나고 가족과 함께 산다. 적은 시간이지만 학원에서 알바를 한다. 지금 글을 쓰는 것처럼 내 우울이나 과거도 벗겨내고 있다. 예전에는 몇 마디 못하고 눈물부터 나왔는데 연습하고 있다. 네가 행복하게만 지내면 된다는 엄마의 말은 지켜주기 어렵다. 하지만 노력하고 있다. 행복까진 갈 수 없어도 현재를 유지하고 일상을 지켜내는 것으로 만족한다. 우울은 누구나 있지만 없는 척 지내니까. 이런 나라도 무언가 할 수 있다면 우울한 당신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 감정의 끝에는 행복도 사랑도 없을 수 있지만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가보자고. 견뎌내 보자고 말하고 싶다. 블루 그레이인 인생에 다른 색을 가진 당신이 찾아와 주면 좋겠다고.
희망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지 않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던데 그게 나에겐 오늘을 버티는 거고 우울을 말하는 거다. 추상적인 희망보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 내 시간은 일정하지 않다. 업 다운의 변화가 심해서 방심하면 절망이 성큼 다가오고 다른 날은 희망을 실현시킬 수 있을 것만 같다. 죽고 싶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고 미워하고 또 미워하면서 사는 삶도 질리는 때가 오겠지. 나이를 먹으면 조금 달라진다는데 무던하고 평온한 하루를 고대하는데 왜 또 불안한 건지. 내가 정말 기다리는 게 뭔지 모르겠다. 때론 안정을 밀어내려는 사람 같다. 익숙한 불행의 도피처에서 도망쳐야 된다고, 관성에 이끌리는 삶이 아니라 이끌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고 또 포기하고. 이런 게 인생이라면 살 만한 것도 같고. 빨리 죽었으면 좋겠기도 하다.
그럼에도 근래 좀 행복한 것 같다. 한 것 같다는 말은 그런 것 같다는 거다. 이번 주만의 감정일 수 있지만 점진적으로 행복을 증가시킬 수 있다면 나중엔 쉽게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될 거다. 행복이나 우울은 한순간에 만들어지지 않으니까. 부지런히 글을 쓰는 사람이 실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행복한 기억을 쌓아가다 보면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된다고 믿는다. 버거운 느낌을 짊어지고 가다 보면 익숙해질 것이다.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바라는 것보다 훨씬, 혹은 바라는 만큼, 혹은 바라는 것보다는 적지만 충분하게 느껴지는 때가 오듯이.
상반기에 쓴 글 파일에서 찾다가 발견
어떻게든 수습하고 싶었는데 마음엔 안 들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