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실에 있으면서 배의 실밥을 뽑았다. 개복 수술을 했기 때문에 배 위에는 길게 자리 잡은 흉터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조폭 영화에 나오는 형님들에게서나 보던 흉터가 내 몸의 중간에 있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요양병원 원장님께서 실밥을 뽑아주셨다. 원장님께선 수술 부위가 잘 아물고 있고, 샤워를 해도 된다고 하셨지만, 아직 내 몸을 볼 자신이 없었다. 수술한 내 몸을 보는 것이 무서웠고 흉터에 적응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좀 더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복대에 배가 쓸려 따가운 느낌에 두툼한 거즈를 대고 있었고, 샤워는 못 해도 조심스럽게 몸을 닦고 머리도 감았다.(역시 기운이 없어서 쉽지 않았다. 하지만 더운 계절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
드디어 6인실로 옮겼다. 한 분이 퇴원을 해서 다섯 명이 함께 있었다. 크게 힘든 부분은 없었고, 다른 환자분들과 말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각자의 병에 대해 이야기하고, 햇볕이 들어오는 곳에 앉아서 광합성도 하고, 텔레비전도 봤다.
10시까지가 휴게실을 이용하는 시간인데, 환자들의 연령대가 높아서인지 저녁 드라마가 끝나면 다들 각자의 병실로 흩어지고 휴게실과 복도는 조용해진다. 나는 그 시간에 휴게실에서 통화도 하고, 그러면서 좀 울기도 하고, 울적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기도 했다
휴게실에서 밖을 내다보면 역시 그 곳도 병원이다.
회복을 위해 운동은 필수이기 때문에 힘을 짜내서 복도를 자주 걸었다. 복도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병실로 눈이 가는데, 병실 앞에는 환자의 이름과 나이가 기록된 팻말이 있다. 그걸 보며 절망을 느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나이와 병을 가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입원하신 분들 대부분의 평균 나이가 내 나이에서 거의 20살에서 40살 정도 많았다. 나는 그분들의 개인 사정이나 삶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분들에 비해 나는 나이가 너무 적은 게 아닌가? 적어도 그분들은 나보다 20~40년을 더 즐겁고 건강하게 사신 거 아닐까? 하며 알 수 없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확실히 알지도 못하고 단정 지어 버리는 것. 무척 싫어하는 편이지만, 나는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억울하다는 생각까지 들고. 이 억울함은 누구를 탓할 수도 없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 더 짜증이 났다.
드디어 외래 진료를 가는 날. 수술 후 조직 검사 결과를 보는 날이다. 그날 전후로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외래 진료 전날에는 결과 보는 것이 무서워서, 외래 진료 날에는 약간의 미열 때문에 내가 코로나에 걸린 게 아닌가 하는 걱정에.
결과는 예상했던 것과 똑같았다. 한 번 더 절망이 밀려와 교수님 앞에서 또 울고 말았다. 멘털이 흔들리는 설명을 잔뜩 듣고 진료실에서 나왔다. 물기가 가득한 눈을 남들에게 보이기 싫어서 억지로 삼키고 또 삼켰다. 우는 나를 본다면 사람들이 불쌍하게 생각하고 안쓰럽게 볼 것 같아서다. 그럼 자존심 상하니까.
병원 원무과에서 기다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병원에는 어쩜 이렇게 세분화된 과가 많을까? 위, 유방, 간, 폐...... 어쩌고 저쩌고. 사람들은 왜 이렇게 아플 가능성이 많은 걸까? 병원에 가득한 사람들은 어떤 사연이 있을까..... 그 사연들을 눈앞에 그려보니 한숨이 나왔다.
병실 침대에 누워서.
외래 진료를 하고 요양병원으로 다시 들어왔다. 데스크의 간호사 선생님께서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보시는데 눈물이 나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방에 와서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누워있었다. 다른 간호사 선생님께서 들어오셔서 또 물어보시는데 아이처럼 침대에 누워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울먹거렸다. 내 팔을 토닥여주며 들어주시는데, 기분이 나아지면서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꺽꺽거리면서 울었다. 내가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저녁에는 큰엄마와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받을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 전화를 받으면 분명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울 게 뻔하기 때문이다. 죄송스럽지만 내 마음이 너무 불안정해서 이것을 컨트롤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 엄마에게서 문자가 왔다. 자판 치기도 힘들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