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 5분에 탑승 수속이 마감되었다. 대구를 출발하여 한 시간 남짓의 짧은 비행 끝에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미리 예약한 렌터카를 인수해 우리는 제주도 여행을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저녁은 숙소에서 휴식하며 보내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제주도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으니까. 여행이 주는 이상한 울림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빗소리가 노랫소리 같았다.
흐린 하늘 아래 제주도 특유의 감성이 바람에 실려온다. 이곳의 날씨는 좀처럼 예측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더 매력적이고 다양한 풍경을 즐길 수 있다. 그런 변덕스러움이 나와 닮은 듯하다.
고정되고 정체되어 있는 것들은 따분해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일까? 서울을 시작으로 경기북부와 전라남도를 거쳐 이제는 대구와 경상북도를 오가고 있다. 역마살이라도 낀 듯한 내 삶이지만 다르게 보면 꽤 다채로운 색으로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매 순간순간마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순간들이 모여 내 인생이 더 재미있어지는 것은 아닐까.
“비 온 후엔 비자림이지!”
호기롭게 외쳤다. 그러나 역시 정해진 경로를 벗어나 결국 발길은 내 마음 가는 대로 향한다. 이런 변덕에도 그는 늘 아무 말 없이 잘 따라와 준다. 비자림 가는 길에 있는 산굼부리.「결혼의 여신」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알게 된, 가을의 억새와 갈대가 매력적인 곳. 약 10년 전 가을, 혼자만의 제주도 여행에서 이곳을 찾았을 때가 생각난다. 노을 지는 한라산 풍경과 바람을 따라 이루던 억새의 은빛 물결에 눈부시던 날이었다. 그 후로 가을이면 늘 이곳을 떠올렸다.
이름 모를 이들의 무덤과 서서히 말라가는 식물로 을씨년스럽던 겨울의 분위기가 오히려 정돈된 인상을 준다. 가을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힘들이지 않고 내 발길을 마음 가는 대로 흘러가도록 맡겨본다. 좋아하는 공간을 함께 거닐며 그 아름다움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비가 내린 후의 비자림은 싱그러운 숲의 향기를 품고 있다. 그 숨결이 내게 닿는 것 같다. 걷다 보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 부부가 되는 과정과 비슷해 사랑 나무라고도 하는 연리목을 만난다. 서로 다른 나무가 어떻게 하나의 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이건 아마도 생존의 문제였겠지만, 누군가의 눈에는 두 나무의 사랑으로 보였나 보다. 변덕스러운 기질을 가진 나로서는 늘 궁금할 따름이다. 그 수많은 유혹과 변덕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말이다. 연리(連理)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두 나무의 가지가 서로 맞닿아서 결이 서로 통한 것'이라 한다. 다르면서도 비슷한 우리의 결이 어떤 식으로 서로를 흡수하고 버티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