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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강가 Sep 28. 2023

13. 가벼움

#1 겨울, 스며드는 감정의 온기


참 많이도 걸었다. 하지만 아직 걸음을 멈출 수는 없다. 제주도에 왔으면 오름 한두 군데 정도는 가봐야 한다. 사실 제주도는 살면서 이번이 네 번째다. 남들은 한 달에 한 번도 간다는 제주도인데, 내 발길은 어쩐 일인지 잘 닿지 않았다. 내가 오름을 만난 것은 세 번째 여행길이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진행한 오름 투어에서 이른 아침에 만난 동거문오름이 나의 첫 오름이었다. 올레길은 걸어보았으니, 이제 제주도를 방문하면 오름 한두 군데는 꼭 방문하리라고 다짐했었다. 그것이 5년이나 걸릴 줄은 몰랐지만.





월랑봉(다랑쉬오름)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시작부터 계단을 올라야 했기에 가벼운 산책길 정도로 생각했던 나는 약간 당황하고 말았다. 그 덕에 바람이 강하게 부는데도 춥지 않았고, 점차 말을 잃었다. 천천히 풍경을 감상하며 올라야 힘들지 않건만 산을 오른 지 오래라 감을 잃었는지 진격하듯 앞만 보며 걸었다. 그러다 금세 지쳐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었을 때에야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곧 여유를 되찾고 사진도 찍고, 풍경을 담으며 50분가량을 걸으니 정상이다. 그대로 주저앉아 시간을 보내고는 반대편으로 내려왔다.





일몰까지의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구름이 많아 일몰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지만 근처 용눈이오름으로 옮기기로 했다. 사진을 좋아하는 그는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서 보았던 사진 속 용눈이오름이 궁금하다고 했다. 나도 역시 김영갑 작가가 왜 그렇게 용눈이오름을 사랑했는지 알고 싶었다. 월랑봉을 올랐던 때문일까? 용눈이오름은 그보다 비교적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용눈이오름은 사방이 부드러운 호를 그리고 있다. 부드러운 단단함이란 이런 것을 말하는 것만 같다. 일몰이 가까워지며 능선의 고운 자태가 점점 짙어져 간다. 바람의 세기도 점점 강해진다.





"에이, 날아갈 정도는 아니… 으아악!! 나 좀 잡아줘!!!!!"

바람이 세서 날아갈 것 같으니 조심하라는 그의 말에 코웃음을 치던 내 발이 땅에서 붕 떠버린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제주의 바람을 우습게 생각했던 내게 용눈이오름은 어디 한 번 당해보라는 듯 장난을 쳤다. 그렇다. 그 바람을 견디기에 나는 한없이 가벼운 사람이었다. 





나는 나의 그 가벼움이 싫었다. 알맹이가 없이 속 빈 강정 같은 가벼움은 내 무게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 되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기분을 주었다. 몸도 마음도 한없이 가벼운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으로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매사 무겁고 진중하기만 했고, 그러다 보니 점점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애초에 나는 무게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이 작은 체구에 무게감을 실어 넣으려 했던 것은 어쩌면 나를 옥죄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이제라도 나이에 맞지 않는, 세월에 맞지 않는 무게감을 조금씩 덜어 내보려 한다. 그것이 나를 한없이 가벼운 사람처럼 보이게 할지도 모르지만, 내 안에서는 진지함과 가벼움 사이의 균형을 잡아 나가는 일이다. 용눈이오름이 주는 풍경에 삶의 무게는 바람에 실어 보내고, 시원한 맥주로 몸의 무게를 채워본다. 또다시 바람에 날아갈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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