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이었을 때, 서른으로 향하는 그 길목에서 울렁거리는 마음을 잠재우기란 쉽지 않았다. 열아홉에서 스무 살로 넘어갈 때는 사실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미성년자에서 벗어난다는 것과 진로에 대한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기 바빴으니까. 마흔으로 향해가는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서른이 되면 내 인생에 아주 큰 변화가 생길 것만 같았던 그때는 서른이 되기 전에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아니, 무엇이든 해야 했다. 나는 마치 알을 깨고 나온 싱클레어라도 된 것 같았다. <데미안>을 읽고 겁도 없이 독일로 내 생의 첫 해외여행(자유여행)을 떠났는데, 조금은 특별한 스물아홉을 보내고 싶었기에 한복을 맞추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에는 한복 입고 유럽 여행을 가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였다. 결과적으로 서른이 아니라 그 스물아홉의 해가 내 인생을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들었다.
그 이후로도 종종 한복을 꺼내어 입는다. 최근에는 다양한 생활한복이 출시되고 있어 여행길에 한 벌씩 챙겨가기에도 좋다. 구불거리는 파마와 한복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의외의 조합으로 여행길을 즐겁게 한다. 그가 선물해 준 리슬 브랜드의 한복을 입고 버선과 고운 꽃신까지 신으니 완벽하다. 내 짐에서 버선과 꽃신을 꺼낼 때 그는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시대에 누가 이런 것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우리의 일정은 빽빽하지 않고 느슨하다. 무계획이 계획인 나와 그래도 어느 정도의 계획은 필요하다는 그는 꽤 합이 잘 맞는다. 한두 군데의 목적지를 정해놓고 동선을 따라 여유롭게 이곳저곳을 다니며 둘러본다. 그러다가 발견한 곳이 혜원책방이다. 책을 좋아하기에 어느 여행지를 가더라도 책방 한 군데는 꼭 가보려 한다. 무인책방은 처음이었는데 꼭 누군가의 서재를 훔쳐보는 기분이었고,그곳에서 만난 순한 개는 우리의 여행 사진을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내게 다가오던 녀석을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으니까.
다시 차를 몰고 해안도로를 달리다 멈춘 곳은 하도리의 별방진이다. 숨어있는 보물 같은 장소를 발견한 기분이다.지금까지도 한복을 입은 것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고생각한다. 이곳은 한복이 제 빛을 내기에 딱 안성맞춤이었다. 아무도 없는 성곽에서 우리는 꽤 오래도록 머물렀다. 계획이 없이 다니는 것의 최대 장점은 이런 것이 아닐까? 머물고 싶은 장소에서 아무런 구애 없이 머물다 가는 것.
용두암에서 출발해 동쪽 해안을 따라 내려오니 어느새 섭지코지까지 왔다. 사람이 많은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우리는 글라스하우스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섭지코지 산책로와는 다르게 이쪽은 마주치는 사람의 수가 손에 꼽을 정도라 자유롭게 거닐 수 있어 좋았다. 한복을 입고 다니다 보면 마주치는 시선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는데, 흘긋거리는 시선 정도야 넘길 수 있는 수준이지만 대놓고 빤히 쳐다보며 수군대면 꼭 벌거벗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전혀 부끄러운 옷이 아님에도 민망해져 나도 모르게 멈칫하게 된다. 그럼에도 한복을 꺼내어 입는 것은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나를 조금은 특별하게 만들어주기에.
아, 맞다! 이번에는 버선에 고무신까지 신었으니 쳐다볼 만했구나!
슬슬 해가 지려하고 있다. 봄이 아닌 겨울의 동백을 만나고 싶어 위미리에 있는 제주동백수목원을 방문했다. 하얗게 눈이 내려앉은 동백을 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늘 날씨는 내편이 아닌 것 같다.
이곳의 동백은 애기동백이다. 키는 작지만 꽃은 크고 화려하다. 늦가을부터 맺히는 꽃망울이 12월이 되면 만개해 꽤 오랫동안 피고 지는데, 한 두 잎씩 떨어지는 꽃잎이 벌써 땅 위에 수북하다. 잘라놓은 색종이 조각 같은 꽃잎들이 깔려있는 수목원에 황금빛 햇살이 내려앉는다. 핑크빛 꽃이 열린 나무 사이로 비치는 그 햇살 아래서 또 한 번 조금은 특별한 시간을 만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