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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강가 Sep 29. 2023

15. 각자의 밤

#1 겨울, 스며드는 감정의 온기


숙소에서 씻고 잠이 들 무렵, 그는 내게 갑자기 청혼을 했다. 우리가 즐겨보던 예능 프로그램의 마지막 회차를 미끼로 말이다. 방심하고 웃으며 보고 있던 영상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리며 그의 모습이 나왔을 때만 해도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런 내게 그가 조심스럽게 내민 것은 웨딩슈즈였다. 그제야 내게 놓인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청혼을 받으면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난 그저 놀란 나머지 술기운도, 잠기운도 모두 달아나고 아무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을 뿐. 이렇게 폭탄을 던져 놓고 그는 잠이 들었다. 연말부터 내게 농담 삼아 던진 말이 농담이 아니었던가. 비혼주의자임을 알고 있으면서 내게 청혼을 하는 것에 대해 그는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나 역시 풀지 못할 어려운 숙제를 떠안고 잠을 이룰 수 없어 맥주만 마셔댔고,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밤을 보냈다. 




프러포즈받고 술 마시는 여자는 세상에 너뿐일 거야.

쌓여 있는 맥주 캔들을 보며 그는 내게 농담처럼 말했다. 그냥 잠이 오지 않았다고 둘러댔지만 여과 없는 표정에서 이내 모든 것이 드러나버렸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2019년의 우리는 서로 다른 꿈을 꾸며 이기적으로 굴었는지도 모른다. 준비를 많이 한 것 같은데 호응해주지 못해 미안하기도 했지만, 부담되는 마음에 이별까지도 생각했었다. 상처받은 마음을 갈무리하고, 그는 내게 최대한 부담을 주지 않으려 노력해 왔다. 그날의 밤이 지금 우리에겐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고, 종종 그날을 이야기하며 웃곤 한다. 성급하게 이별을 선택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날을 잡고 하는 청혼은 의미 없는 것 같아 자신의 마음을 전달했을 뿐이라는 그에게 지금에서야 나는 뒤늦은 대답을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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