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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한 날에

by 려원
FB_IMG_1684327228668.jpg 윤향근 작가님


어느새 꽃들은 만삭인 채 몸이 아래로 향하고,

여름을 잉태하려는 듯 오월을 무럭무럭 살찌워 간다.


어제의 미련이 지나간 자리에 아카시아 꽃은 무르익어서,

소년과 소녀가 이야기를 나누던 유년의 그리움을 주렁주렁 매달고,

고개 숙여 말없이 나를 내려다본다.


무릇 낮은 자의 자세란, 이와 같이 고개를 숙이는 거라고 했던가.

사람 마음도 건조하면 시든 몸과도 같은데, 어쩌자고 나는 자꾸만

굽힐 줄 모르는 고개 들어 꽃들만 바라본다.


사람의 욕심과 허영심은 끝이 없고,

잘못 눌린 혀는 한 치 앞도 보지 못해 코가 깨질 텐데,

그래도 나의 고개는 굽힐 줄 모르네.


꽃들이 만삭으로 배불러 오고, 마음 건조한 날에는

내 영혼의 깊은 비라도 흠뻑 내렸으면 좋겠다.


굽힐 줄 모르는 민망한 내가 우산 좀 써서 꽃들 좀 가릴 수 있게.


FB_IMG_168311779181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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