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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려원 Oct 07. 2023

아버님과 호박죽

feat.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

며칠 감기로 약을 먹다가 약기운에 몸이 더 가라앉았다. 입맛 없어하는 날 보고 남편이 호박죽과 팥죽을 사 왔다. 호박죽은 어머님이 지금도 좋아하시고 아버님은 두 가지 모두 좋아하셨다. 두 분이 겨울 감기를 앓아 내실 때 호박죽과 팥죽을 사다 드리면 잃었던 입맛을 되살려 내곤 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오래전 시장에서 커다란 솥단지에 모녀가 직접 끓여 던 가게였다. 아버님의 긴 병원생활중에 가끔 그곳을 이용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호박죽은 가을날 노랗게 익어가는 은행잎을 닮아 있었다. 피어오르는 김을 보며 가수 윤도현이 부른 <가을 우체국 앞에서> 속 내용의 주인공을 가끔 떠올리곤 했다.


화자는 그대라는 대상의 기다림으로 스쳐가는 발자국들 속에 노랗게 익어 가는 단풍잎들이 떨어져 없어지는 것을 본다. 한여름 소나기에도 굳세게 버텨 내는 꽃들. 찬겨울 눈보라 속에서도 우뚝 솟아 있는 나무들. 하늘 아래 그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화자는 자신도 모르게 우연히 불러온 깊은 생각 속에 빠져든다. 세상에 머물러서 영원히 아름답게 남아 있는 것들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겨울날 김이 모락모락 한 솥단지 앞에서 깊은 생각들이 스쳐 지났다. 아버님은 이 겨울이 끝나기 전 호박죽을 몇 번이나 더 드실 수 있을까. 그 가게를 나는 몇 번이나 더 올 수 있을까. 발걸음이 여러 차례 더 드나들길 바랐다. 겨울만 이기를 바랐다. 숨 쉬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화자의 생각들을 떠올렸다. 그해 겨울이 채 끝나기도 전 아버님의 짧은 겨울도 끝났다.


호박죽을 드시며 아버님은 어떤 생각 이셨을까.  그 마음을 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다 알텐데 아버님은 드시면서 고맙고 미안하단 말씀을 늘 내게 하셨다. 단 몇 번도 안되지만 맛있게 드셔 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 속에서 나는 죄송하고 미안했다. 


그해 아버님께 다 전해 드리지 못했던 호박죽을 먹는다. 찬겨울날 죽을 포장 하려 서성이던 마음들이 보인다. 둥그렇고 하얗게 말아 넣은 떡들이 그때의 마음처럼 호박죽 속에서 둥둥 떠오른다. 당신의 모습이 환하다. 아버님께 전하고 싶다. 당신께서 빚어 놓고 간 나의 계절 이어서 이 가을날은 여전히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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