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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려원 Nov 12. 2023

가을걷이

우리도 그렇게



1】회상

여러 개의 밭이 있던 부모님은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늦둥이로 태어난 나 홀로 남겨졌을 땐 농사일을 거의 손 놓은 뒤였다. 위에 언니와 오빠들이 사회로 나가니 돈쓸일 많지 않았고 농사일을 더 하지 않으셔도 되었다. 아버지도 일을 안 하는 밭은 팔고 정리를 하셨다. 마당 한가운데로 들어서는 텃밭이 커지기 시작하던 때도 그쯤이었다.


남겨진 몇 개의 밭 중 하나는 여름 채소를 길러 내고 겨울 김장을 위해 무와 배추를 심으셨다. 온전히 자식들을 먹이기 위한 밭이었다. 계절이 지나고 바뀌어도 자식농사는 끝이 없는 것이었다. 부모님의 흔들리지 않는 기둥 위에서 길러지는 온전한 사랑이었다. 사랑은 탈색되지 않는 영원한 것이다.



여러 개 중 쓰지 않는 작은 하나를 동네 가까운 분께 내주었다. 김장철이 되그분은 해마다 우리 집으로 무와 배추를 싣고 오셨다. 작은 하나를 아무 대가 없이 그냥 얻게 된 고마움의 표시였다. 바라지 않은 일에 부모님도 감사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장 배추들을 내려놓는 사이 엄마는 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담가 놓았던 약주와 안주상을 보셨다. 고마움이 오고 가는 정이 해마다 그쯤이면 한상 가득 차려지곤 했다. 그런 날은 가끔 가을비가 내렸다.



아버지의 장화가 툇마루 밑에서 거꾸로 몸을 풀어놓은 채 피로를 삭혀 내는 한낮의 오후였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이웃분의 대화가 가을비 속에서 겨울로 가고 있었다. 무와 배추도 김장이 되기 위해 숨죽이고 있었다. 무와 배추는 만나면 김장부부로 언제나 한 몸이 되었다. 그들의 한나절은 땅속 보다 더 깊고 알차게 속을 익혀 냈다. 



2】현실

1). 남편의 지인이 놀고 있는 밭을 빌려 주었다.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외곽이었다. 주말이면 아이를 데리고 농장을 다녔다. 따스한 봄이 오면 상추 씨를 뿌리고 오이도 심고 감자도 심었다. 내 맘대로 안 되는 자식처럼 들녘의 농사가 그랬다.  2). 여름 지나 가을 무렵 무와 배추씨를 뿌렸다.  "농사를 잘못 지으면 좀 어떠냐" 며 남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렁한 눈빛 갈아엎던 순간 하늘은 메마른 기운 없이 단비를 내렸다. 3). 위로하며 내린 가을볕에 사랑의 뿌리도 세월 깊게 돋아 났다. 허공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들 위로하며 흔들리는 이파리가 당신의 말씀처럼 들리곤 했다. 4). 다독이며 눈물 젖은 땅을 갈아엎던 그해 사랑으로 내 자식 여럿 길러 우리도 그렇게 가을걷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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