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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푸꾸옥으로 출발(2-2)

12, 할빠와 손녀의 두 번째 여행(24, 3,22~3, 26 베트남)

by 숨터

자유여행에 제일 좋은 게 뭐냐고 묻는다면 묵은 비행기 마일리지를 쓸 수 있다는 걸 꼽고 싶다. 여행을 가지 않거나 가더라도 패키지를 이용하니 마일리지는 해마다 사라지고 있어 얼마나 속이 상했던가. 사라지는 게 아까워 항공사 몰에서 필요도 없는 물건을 사기도 했다.

마침내 마일리지를 쓸 기회가 온 것이다. 대한항공으로 홈페이지로 들어갔다. 신나게 비행기표를 샀다. 1인당 33000마일 세 명이 99000마일이 날아갔다. 돈인 듯 짐인 듯하던 마일리지가 사라지니 조금은 아까우면서 속이 시원했다.

숙소로는 빈펄리조트를 예약했다. 빈펄리조트는 수년 전 베트남 배낭여행 시 나짱에서 이용해 본 적이 있어 믿음이 갔고 픽업, 랜딩 서비스도 있어서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 서비스가 자유여행을 결심하게 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더블베드 두 개인 방에 엑스트라 베드 한 개 추가해서 예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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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펄리조트에서 우리숙소


이제 다 준비된 듯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현지에서 여행 동선을 짜는 일이었다. 전제조건은 그 동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에게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 있었고.

자유여행이므로 가이드 역할을 할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말도 잘 통하지 않을 거고 믿을 곳도 없으니 공부를 철저히 해야 했다. 제일 도움이 되는 건 실제 그곳을 여행한 사람들의 생생한 여행기를 보는 거 라는걸 나는 오래전 배낭여행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행기들을 보기 시작했다. 여행기들 중에는 후원을 받고 쓴 것들도 많아서 너무 상업적이거나 진실성이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었다. 그런 건 거르든지 알아서 뺄 건 빼고 더할 건 더해서 참고했다.


그러다가 나는 화들짝 놀랐다. 베트남에서는 14세 미만의 아이를 데리고 가려면 가족관계 증명서가 필요하다는 글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보호자가 부모 아니면 부모의 영문동의서 공증까지.

설마 싶어 여행사 약관들을 찾아보니 그런 규정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아이들 유괴납치를 방지하려는 게 아닌가 싶긴 한데 이건 차라리 내가 보지 않았더라면 싶었다. 이런 주의 사항이 있다는 걸 모르고 그대로 간 사람들 중에 그걸 준비하지 않아 돌아왔다는 글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이건 특수한 상황에 대비한 서류이지 늘 적용되는 건 아닌 거 같았다. 하지만 알면서 무시할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라는 건 언제나 존재하는데 하필이면 그 불운이 우리에게 걸릴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러면 많은 여행사에서는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준비도 부족했던 자유 여행의 사례로 우리를 신나게 거론할지 모른다.

떠날 날을 며칠 앞두고 발견한 터라 갑자기 바빠졌다. 한 집에 사니 손녀와 우리는 동일 주소증명을 할 수 있어 서류 한 가지는 덜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부모의 동의서를 작성한 후 아들은 인터넷을 뒤졌다. 영문 번역해 공증해 주는 곳이 생각보다 많았는데 값은 천차만별이었다. 그중 제일 양심적으로 부른 곳에 의뢰해 마침내 서류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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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펄리조트 수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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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서 내다보이는 풍경


마침내 15년 전의 그나마 내가 지금보다는 젊었을 때 갔던 베트남을 다시 가게 되었다. 설레었고 그때의 기억도 생생히 살아났다. 베트남은 자존심 강하고 부지런하면서 순박하다, 그때 내가 느낀 인상이었다. 지금은 달라졌을까?

나는 그때 수많은 커피들이 있던 호찌민 시장의 커피 향을 즐겼고 월남전 때 파두었던 구찌터널 안도 들어가고, 베트콩들이 다녔다던 땅 속 세상을 기어서 체험도 해보았다. 스스로 베트콩으로 전투를 했다고 하던 , 그리고 정말 베트콩처럼 생겼던 검은 피부에 작고 마른 체격이지만 다부지게 생겼던 구찌터널 가이드도 생생하다. 그때 한국인 관광객은 우리 둘 밖에 없었다.

가이드는 날카로운 눈빛을 반짝이며 당당하게 말했다. 베트남은 세계에서 미국과 싸워 이긴 유일한 나라라고. 나는 가이드에게 물었다. 오래전 우리가 베트남 전을 치렀는 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가이드는 감사하게도 그 당시 한국도 어려웠던 걸 알고 그럴 수밖에 없었을 사정을 이해한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 가이드가 베트남인을 대표하는 건 아니겠지만 그 대답은 참 위로가 되었다. 우리는 피차 아픈 역사의 상처를 가지고 있었지만 서로를 미워한 적은 없었던 거 같다.

전쟁의 상흔이 아직 남아있었던 15년 전 그때도 베트남은 한국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는데 지금은 더 그런 거 같다. 박항서 감독까지 가교를 놓아주었으니.

철썩대는 파도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던 무이네의 낭만 넘치던 방갈로가 생각난다. 꼭 다시 가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푸꾸옥은 내가 기억하는 베트남과는 많이 다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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