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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터 Jan 14. 2021

복도에서 길을 잃다.

  



샤워를 하고 있는데 아득하게 어린아이의 울음소리 같은 게 들렸다. 나는 수돗물을 껐다.  

“엄마~ 엄마~”

멀리 들리는 게 바깥에서 나는 소리임에는 틀림없었다. 우리 아이 목소리와도 많이 닮아 있었지만 서너 살 어린아이들 울음소리는 비슷비슷하지 않은가. 

게다가 손녀는 제 엄마랑 제 방에서 놀고 있는데 밖에서 혼자 울고 있을 리 없었다. 이웃 아이인가? 애가 우는데 왜 달래는 어른 소리는 들리지 않지? 신경이 쓰여 나는 하고 있던 샴푸질을 중단하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그칠 듯 계속 이어졌다. 혼자 남겨진 듯 아이의 울음소리에 두려움이 느껴졌다. 어른이 옆에 없는 거 같았다. 우리 아이든 남의 아이든 도움을 청하는 소리에 그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서둘러 머리를 헹궜다.      


목욕탕 문을 열고나오니 아이의 울음소리가 좀 더 분명해졌다. 우리 복도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옷을 입는데 울음소리가 멈추었다. 갑자기 조용해진 게 더 불안했다. 나는 급한 걸음으로 현관으로 갔다. 

 현관문을 여는데 뜻밖에 며느리와 아이가 복도에 서 있었다. 세상에! 밖에서 들렸던 울음소리의 주인은 손녀였다! 집에 있던 실내복 차림 그대로 인 아이는 온 얼굴이 눈물로 젖어있었고 울음의 끝을 채 끊지 못하고 꺽꺽 대고 있었다. 며느리는 아이를 안고 열심히 달래고 있었다. 당황한 내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냐? 언제 나간 거야?”     




 며느리는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고 했다. 아이는 혼자 잘 놀고 있었고 집 안에는 내가 있으니 안심하고 금방 다녀올 거라고 말해주었다. 분리불안이 없는 아이였기에 걱정도 안 했다. 그런데 아이는 제 엄마가 나간 뒤 그 뒤를 따라 나갔던가 보았다. 어느새 자라난 아이는 깨끔발을 들면 문고리에 손이 닿았다. 문고리도 돌릴 수 있을 만큼 요령도 생겼고 팔 힘도 세졌다. 

아이가 문을 열고 나오는 걸 몰랐던 며느리는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이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을 때 제 엄마가 탄 엘리베이터 문은 닫히고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아이는 집으로 되돌아올 수도 없었다. 아이가 나간 뒤 현관문도 저절로 닫혀버렸기 때문이었다. 우리 현관문은 지문 인식키였는데 비밀번호로도 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의 손가락은 지문 등록하기에 너무 작았고 혼자 내보낼 일도 없는  어린아이기에 비밀번호가 필요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초인종이 있지만 어른의 키에 맞춘 거라 아무리 깨끔발을 하고 뛰어도 아이가 누를 수가 없었다. 


아이는 텅 빈 복도에 갇혀버렸다.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을까. 

아이는 우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울음소리로 자신이 처한 위기를 알리고 누군가 와주길 기다렸다. 



 복도에서 보내는 구조신호는 쓰레기를 버리고 오는 며느리 귀에도 들렸고 집안 목욕탕 안에 있던 내게도 들렸다. 며느리는 나를 믿었고 나는 며느리를 믿었지만 누군지 모를 아이의 울음소리에 모두 불안해졌다. 며느리는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탔고 그 시간에 나도 목욕탕을 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거의 동시에 복도에서 길을 잃은 우리들의 아이를 발견한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네댓 살 된 아이가 강추위 속에 내복 차림으로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는 뉴스를 내보냈다. 다행히 인정 많은 부부의 눈에 뜨여 아이는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내복아이는 엄마를 찾아 나왔다가 현관문이 잠겨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한 거라고 말했지만,  9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아이 혼자 빈집에 두었다는 걸로 엄마는 아동 학대를 의심받고 있었다. 엄마는 내복아이를 방임한 게 아니라 어린이집에 가지 않으려기에  집에 혼자 두고 일하러 나갔다고 항변했다. 이혼 후 엄마는 혼자 아이를 돌보며 생계비를 벌고 있었고 어린이집에 가지 않으려는 아이를 맡길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손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줄 알았다. 우리와 외출할 때면 엘리베이터 버튼 누르는 건 아이 담당이었다. 그런데 아이는 엘리베이터를 누르지 않았다. 만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아이가 그걸 타고 엉뚱한 곳에라도 갔으면 어떡할 뻔했을까. 내복아이처럼 거리를 헤매고 다녔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아이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대신 제 자리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청하며 소리 내서 울었고 손녀를 도와준 사람은 가족인 제 엄마와 나였다.   


 내복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방임한 건지 억울한 오해인지 그 뉴스만으로 다 알지 못한다. 근래 아동학대나 방임의 문제가 심심치 않게 터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아동학대의 문제가 터지면 심란해지고 마음이 많이 아프다. 특히 우리 손녀 또래의 어린아이인 경우 아픔은 더 절절해져 뉴스를 보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아동 학대만이 아니라 가끔은 아이를 유기하거나 살해한 미혼모의 끔찍한 사건도 터져 사회적 공분을 사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가끔은 궁금하다.

그런 사건마다 아빠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인간은 자웅동체 생물이 아닌데. 

미혼모도 혼자 아이를 만들진 않았을 텐데.     


일반적으로 이혼 시 엄마가 아이를 맡는 경우가 많다. 모성애는 부성애보다 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게 아이에게 낫다는 게 일반적 통념이다. 하지만 엄마 혼자 아이를 키워내기에 세상은 녹록지가 않다. 생계와 육아 모두 책임지던 엄마들이 마음의 병에 걸리거나 좌절, 혹은 포기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곪아가던 것들이 터져 뉴스에 등장하면......

 그때는 이미 늦다.           



그날 이후 나는 아이에게 현관 비밀번호를 가르쳐주었다.  일곱 자리 나 되는 긴 숫자로 설정되어 있지만 숫자 읽을 줄 알던 아이는 신이 나서 열심히 번호를 익혔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는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오게 되었다. 자기가 문을 열 수 있다는 것에 희열을 느낀 아이는 외출에서 돌아오면 다른 사람들은 현관 키에 손도 못 대게 한다. 

이제는 적어도 우리 아이는 복도에서 길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현관문이 잠겨 집안에 들어가지 못해 거리를 헤매는 일은 우리 아이에게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잠긴 문앞에서  울고 있을까.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차가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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