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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터 Jan 20. 2021

정인아, 넌 어쩌자고 그렇게 예쁘게 웃니

아프고 아파서 그동안 입 밖에도 낼 수 없었던 그 이름에 대해 이제 글로 쓴다.

정인아.     


정인이 사건이 터지고 나는 한동안 기사를 읽지 못했다. 컴퓨터를 하다가 뉴스에서 헤드라인이 보이면 절대 클릭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에 정인이 이야기가 나오면 채널을 돌렸다. 정인에 관한 내용은 읽을 수가 없었다. 헤드라인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프고 아팠고 기사의 첫 줄만으로도 눈물이 쏟아졌다.     

시간이 지나고 사건들이 구체화되면서 내 마음에도 굳은살이 생겼다. 이제는 기사를 피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에서 얼굴을 다 감춘 정인이 부모들의 모습도 본다. 하지만 티 없이 밝게 웃고 있는 정인이의 사진을 보면 다시 울컥해진다.

넌 어쩌자고 그렇게 예쁘게 웃니.        



  정인이가 이 세상에서 보낸 삶은 16개월이 전부이다. 그 16개월이라는 숫자가 우리 아이의 고통과 오버랩되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그 무렵 우리 아이는 병원에 있었다.

 아이는 심한 화상을 입고 13일 동안 병실에만 갇혀 지냈다. 정인이보다 한 달 어린 15개월이었다. 그 개월 수만 되어도 아이는 자신이 사랑받는지 미움받는지 알았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제 감정을 눌러야 한다는 것도, 참아야 할 수밖에 없는 게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나마 알았다.     


 

 화상 환자는 모든 빛을 차단해야 했다. 복도에도 나갈 수 없었고 병실 안에서도 불을 켤 수 없었다. 청소하시는 분이 들어오면서 병실 문이 열리면 그리운 듯 환한 복도를 쳐다보던 아이의 슬픈 눈동자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나가면 더 아파진다는 말을 알아들은 듯 아이는 나가자고 보채지 않았다. 걸음마를 시작한 때라 걷고 싶어 했지만 병실 바닥을 두어 번 걷는 걸로 아이는 만족해주었다. 온몸에 주렁주렁 매달린 수액 줄을 힘들어했지만 그걸 빼내면 안 된다는 그것도 아이는 이해했다.



 아이는 자신을 치료하러 오는 간호사 의사들에게 방긋방긋 웃어주는 것으로 심심함을 달랬다. 병원에서는 모두 아이를 귀여워해 주었다. 15개월이던 아이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한 건지. 방긋방긋 웃으면 사랑받는다는 것도.

 그건 아이가 특별히 더 영리해서가 아니었다. 아기는 저절로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었다. 끊임없이 이해시키고 사랑으로 품어주는 가족들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보호자를 신뢰하는 아이는 고통조차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정인이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미움받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보호자를 신뢰할 수없다는 것도, 하지만 자신이 왜 미움과 학대를 받아야 하는지는 몰랐을 것이다. 어른인 나도 알지 못하지만 정인이 이 세상에 없는 지금은 더 알 수가 없다.

병실에 입원했던 15개월 때의 우리 아이를 보면  정인도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을 충분히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슬프다는 말도 괴롭다는 말도, 아기라면 당연히 해야할 응석도 한 번 부리지 못하고  견뎌내고 체념하는 법을 먼저 배우다가 고통 속에 짧은 생을 끝냈다.

왜 그래야 했을까?

그들 가족들은 왜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없는 아기를 학대했을까?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이 왜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어린이집 선생들은 고통받는 정인을  품어주었다니 그나마 떠난 정인에게 위안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아프다. 참,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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