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결혼식

by 숨터


연회장 안은 디제잉의 일렉토릭 음악과 트롯들이 번갈아 흥을 돋우고 사람들이 즐겁게 춤을 추고 있었다. 라라 랜드에서 라이언 고슬린과 엠마스톤이 보여준 아름다운 춤을 추는 감탄할 만한 커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남자들은 양복 정장이었지만 여자들은 영화에서 본 것처럼 어깨나 등을 다 드러내거나 치렁치렁한 파티 드레스가 아니라 대부분은 평소에도 입을 수 있는 원피스 차림이었다.

미국이니 뭔가 다를 거라는 건 나의 선입견일 뿐 그들은 한국에서 흔히 만나는 여느 한국인들과 같았다. 한국과 다른 걸 굳이 찾자면 나처럼 꽁무니를 빼는 사람들보다는 분위기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정도일까.


즐거운 그 분위기 속에 차마 끼어들지 못하는 내가 나 스스로도 답답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이런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원래 음주가무를 즐기던 민족이었다. 마을마다 장구나 징, 꽹과리 같은 악기들을 가지고 있었고 마을을 대표할만한 뛰어난 악기 연주자들도 한 둘은 있었다. 추수나 좋은 일이 있으면 모여 풍악을 울리고 춤과 노래가 있는 흥겨운 잔치판을 가지는 것이 일상이었다. 우리가 풍악을 잃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부터였다. 전쟁 막바지에 이르자 일제는 무기를 만들기 위해 집집마다 놋그릇이나 놋수저들을 강제 공출해갔고 대부분 놋으로 만들어졌던 꽹과리나 징, 날라리 같은 악기들도 몰수되어 총알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혹시 항일 운동을 할까 조선인들이 여럿이 모이는 것도 막는 바람에 악기도 없는 마을 잔치는 더욱 힘을 잃게 되었다. 해방을 맞이 했을 때는 마을마다 있던 명 연주자들의 맥이 거의 끊어지고 풍악의 기억도 가물가물해질 무렵이었다. 해방 후 조금씩 되살아나는가 싶었지만 경제개발과 산업화 바람이 불면서 풍류라는 이름은 무위도식 노는 퇴폐적인 향락의 문화로 인식이 되어 하루라도 빨리 버려야 할 폐단이 되어갔다. 치열하게 일을 한 후 경치 좋은 곳에 모여 장구치고 흥타령에 덩실덩실 춤을 추며 다음을 위한 힘을 축적하던 우리들의 옛 놀이문화는 초가집을 헐어버리듯 버려지고 그 자리에는 기타와 팝송과 서구의 놀이문화가 대신했다.

하지만 한국인들만이 가지는 멋과 흥의 DNA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인의 핏속에 살아남아 근래에는 한류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사실 춤과 노래는 한국에서는 문화센터를 통해 저렴한 비용으로 배울 기회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내 주위에도 민요나 가요, 한국무용이나 스포츠댄스나 라인댄스 등을 배우는 친구들이 상당히 많다.

나는 그런 기회를 잡지 못했고 그 바람에 이 자리에서 구경꾼이 되어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을 부러워만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춤 경연대회도 아닌데, 막춤인들 어떨까, 흥겹게 어울리면 되지, 내 핏속에도 춤과 노래의 DNA가 흐르고 있을지 모르는데, 하지만 나와 남편은 의자에 붙들린 채 움직이지를 못하고 있었다.

펼쳐 준 놀이판도 즐길 줄 모르는 우리 모습이 딱해 보이는지 누군가가 나와 남편의 손을 잡아 장내로 끌어냈다. 이왕 나왔으니 같이 어울려 덩실덩실 막춤이라도 춰야지라는 건 마음뿐 무대에 나와도 몸은 여전히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몸을 붙든 것은 내 무의식이고 내 무의식 속에는 잘 노는 건 좋은 일은 아니라는 경제개발 시절에 심어준 놀이문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여전히 남아있었던 건 아닌가 싶다. 거기에 보태 완벽하지 않으면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게 낫지라는 완벽주의, 박자, 리듬 다 무시한 내 춤을 남들이 흉보면 어쩌나, 내 감정보다 남의 시선을 먼저 생각하는 체면 의식과, 실수를 두려워하는 강박증까지 보태졌던 거 같다.


어느 순간부터 나이 든 사람들은 점점 뒤로 빠지고 젊은이들이 무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무대를 차지하는 주 연령층에 따라 MC는 음악도 트롯 같은 익숙한 한국 가요에서 외국가요들로 재빨리 바꾸어주었다.

젊은이들은 사위의 친구들이었다.

결혼 리셉션에는 이민 1세대, 1.5세대. 그리고 사위처럼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라난 이민 2세대들이 섞여 있었다. 사돈과 사돈의 친구들은 이민 1세대이거나 이민 1.5세대여서 한국에 대한 향수가 깊었고 한국어로 우리와의 대화에 전혀 불편함이 없었지만 사위의 친구들은 거의 다 영어를 한국어보다 더 편해하거나 아예 한국어를 모르는 이민 2세대였다.

나와 남편이 사위를 처음 만난 곳은 서래마을의 어느 카페였다. 딸이 사위를 인사시켜주기로 약속한 곳으로 가면서 나는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이민 2세대와 어떻게 대화를 나눌까 내심 걱정했었다. 다행히 사위는 한국어로 일상적인 대화는 가능했다. 능숙하지는 않아 좀 더 깊은 대화로 들어 가면 딸이 나서 통역을 할 수밖에 없긴 했지만.

사돈의 엄격한 가정교육 덕이라 했다. 어린 시절 집에 들어오면 반드시 한국어를 쓰게 했고 한글학교를 보내 한글을 익히게 했다고 했다. 집 이외의 장소에서는 쓸 일 없는 언어를 쓴다는 게 어릴 때는 힘들었지만 덕분에 사위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한국어를 쓸 수 있었고 한국에서 직장을 잡게 되고 내 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사위의 친구들은 거의 대부분 어려서부터 한 동네에서 같이 자라난 아주 오래된 친구들이었다. 나이도 조금씩은 차이가 있지만 존대말이 없는 영어의 특징과 서열을 따지지않는 미국인들의 관습으로 친구가 되는데는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전 우리 한국에서도 오래된 동네 친구들이 많았다. 하지만 변화가 빠른 한국에서는 한 지역에서 오래 살기 어려워졌고 학원을 돌아다니느라 동네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기도 어려워졌다. 그래서 대부분의 친구들은 동네보다 학교나 학원 친구들이었다. 경쟁이 치열한 한국사회에서 서로의 위치나 환경이 달라지면 그나마 우정도 쉽게 깨어지곤 했다.

피로연의 온갖 허드렛일 부터 무대를 종횡무진 누비며 활력을 보태주고 있는 사위의 친구들은 사위의 결혼 리셉션에 참석하기 위해 기꺼이 휴가를 내고 비행기를 타고, 혹은 하루 종일 차를 몰고 달려왔다. 넓은 미국 전역에 흩어져 살고 직업군들도 다양했지만 그런 외적인 조건이 그들의 우정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그건 사위도 마찬가지였다. 마이애미에서 있는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갔고 이들에게 그건 당연한 일들이었다. 어느 나라에 있든 어느 지역에 있던 이들의 우정을 막을 장애물은 없었다.

이들을 이토록 끈끈한 정으로 뭉치게 한 것은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하며 성장해서일 수도 있을 거고, 한 지역에서 같이 자라난 한국인이라는 공통점, 그리고 백인 위주의 사회에서 알게 모르게 당해왔을 인종차별도 원인이 되지 않을까?

친하게 지내던 언니가 미국에 살고 있는 고등학생이 된 손녀의 생일 파티 사진을 보여준 적 있었다. 미국의 학교에 다니는 손녀의 사진 속에는 모두 동양인들만 있었다. 한국인은 손녀밖에 없지만 중국인, 동남아인, 일본인들이어서 사진으로 보이는 외모는 큰 차이가 없었다. 당시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없었다. 그 손녀가 사는 곳은 주로 백인들이 사는 동네였고 다니는 학교 또한 백인들이 대부분이었다. 태어나고 자라고 미국 사회에서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 그 과정을 비록 사진을 통해서지만 늘 보고 들었던 손녀였다. 어린 시절의 사진은 백인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느새 사진 속에서 백인들은 사라지고 있었다.

미국은 다양한 인종들이 어울려 살고 있다. 그래서 미국은 인종차별 문제에 예민하여 교육도 모두 어울려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런 교육 덕에 어릴 때는 모두 잘 어울려 놀지만 자라나면서 달라진다고 했다. 서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면서 서서히 백인은 백인끼리 동양인은 동양인끼리 흑인은 흑인끼리 나누어지게 된다고 했다.



노래 부르고 춤을 추던 이들이 어느 순간 어떤 퍼포먼스를 시작했다. 딸을 가운데 두고 맞은편에서 남자들이 어깨동무를 하며 소리소리 지르며 노래를 하다가 손을 뻗거나 몸을 비틀며 딸을 향해 과장적인 몸짓들을 했다. 흘러나오는 음악을 목청껏 따라 부르던 그들 앞으로 사위가 나섰다. 사위는 딸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노래를 부르고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본듯한 구애의 몸짓을 했다.

영어로 된 음악에 영어로 떠들어대는 소리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나는 이들이 하고 있는 퍼포먼스가 무엇인지 몸짓을 보고 느낌으로 이해했다. 아마도 많은 남자들이 구애를 했는데 마침내 사위가 사랑을 쟁취한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는 그런 의미 같았다. 친구들이 만들어주는 딸과 사위의 사랑의 무대가 흥겹고 재미있었다.

그러고도 파티는 지칠 줄모르고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식은 생략하고 피로연뿐이었는데 세시간은 훌쩍 넘겨 네시간이 가까워졌던 거 같다.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기나긴 결혼 피로연이 끝난 후에도 흥이 사그라지지않았던 친구들은 사위와 딸과 함께 모두 사돈의 집으로 향했다. 사돈의 집에는 이들이 놀 수 있는 지하방이 있었고 그곳에는 노래방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밤새워 놀게 될것이다.



나는 그동안 메릴랜드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메릴랜드에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살고 있는지 여기 와서 처음 알았다. 한국에서는 사라져 가는 한국인들의 인정과 정서가 여전히 남아있는 메릴랜드의 모습도 그동안 알지 못했다.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메릴랜드에도 코리아타운도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에 대해서 그리고 메릴랜드의 한국인들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아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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