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by 숨터
KakaoTalk_20211019_142351545.jpg 메릴랜드 코리아타운 조형물



나는 1989년에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직장 일 때문에 미국 버지니아에 먼저 가있는 남편을 찾아 교편을 잡고있던 나는 방학 때 아이들과 함께 가서 한 달을 머물렀다. 당시 우리나라는 해외여행 자유화가 허용되지 않았던 때이므로 외국 친척의 초청이나 국가가 인정할 만한 특별한 용무나 공적인 일 등이 아니면 해외에 나갈 수없었다. 이혼한 내 친구는 아이에게나 이웃들에게 남편이 미국으로 공부하러 갔다고 수년을 속였는데 일반인들에게 외국은 가기도 오기도 힘든 아득히 먼 곳이니 그런 속임이 통할 수도 있던 그런 시대였다.


내가 미국행을 하던 1989년의 우리나라는 개발도상국이었다. 88 올림픽 치른 직후였고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장서자'는 슬로건으로 정보통신 강국의 태동을 막 시작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약소국이었다. 그러니 개발도상국 국민이었던 내 눈에 비친 세계 최강대국 미국은 모든 게 신기하고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웃기는 일이지만 슈퍼마다 바구니 대신 카트가 준비된 것에도 나는 감탄했고 고속도로마다 나무 그늘 아래 쉴 수 있는 탁자와 벤치들이 있어서 우리가 준비해 간 밥을 꺼내 먹을 수 있는 것에도 감동했다. 도깨비 시장에서나 구할 수 있었던 일제나 미제 제품이 즐비한 마트 앞에서는 괜히 주눅이 들었고 다람쥐나 새가 사람을 겁내지 않고 돌아다니는 공원, 나무 우거진 고속도로 주변의 풍경. 모든 게 신기하고 부러웠다.

유명한 관광지인 할리우드도 구경했다. 그곳에 있다는 할리우드 배우들에게는 현실감을 느낄 수없었다. 그들은 우리가 다다를 수 없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한국의 배우가 그들과 어깨를 겨루거나 더 뛰어난 세계적 스타가 될 수 있다는 건 감히 상상조차 해볼 수 없었다.

한국에도 자기 차를 가지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던 때이긴 했지만 일반화되지는 않아 부의 상징처럼 여겨졌는데 미국에는 식구 수마다 한대씩 가지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현대차가 미국에 수출을 시작했다는 뉴스에 뿌듯해했던게 꽤 되었는데 와서 보니 미국 거리에서 보기 어려워 속상해 하기도 했다. 마트에서도 한국 제품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 제품이 미제, 일제를 다 젖히고 마트의 제일 앞에 놓일 거라고 당시 누가 말했으면 농담도 심하게 한다고 하하 웃었을 것이다.




그렇게 개발도상국 국민으로 미국을 첫 방문했던 나는 32년이 지난 2021년 UN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선진국의 국민이 되어 두 번째 미국에 왔다. 이번에도 체류기간은 한 달이었다. 남편을 찾아왔던 예전과 달리 이번은 재미교포와 결혼한 딸의 결혼 피로연 때문이었기에 좀 더 깊숙한 내면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미국에서 살다 잠시 한국에 나와 있는 조카에게 출발하기 전 물은 적 있었다.

"미국으로 갈 때 무얼 준비해가야 하니? 고추가루나 된장 밑반찬 챙겨갈까?"

조카는 그럴 필요없다고 했다.

"다 있어요. 아무것도 준비하지 마세요."

그때만 해도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와서 보니 정말 그랬다. 1989년도 미국에서의 한국의 위상과 2021년도 한국의 위상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32년의 세월이 한국을 얼마나 많이 바꾸어 놓았는지 나는 두 번의 미국 방문에서 온 몸으로 느꼈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아는 미국인들은 거의 없거나 알아도 전쟁을 치른 가난한 나라라는 부정적 이미지뿐이던 1989년과 달리 2021년의 미국에서는 BTS나 삼성과 엘지, 현대차를 모르는 미국인들은 거의 없었다. 2021년의 한국은 세계가 인정하는 정보통신강국이었고 한류 문화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휩쓸고 있었다.

마트에 놓인 카트조차 부러워했던 나는 미국 거리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현대차를 타고 마트의 진열대 입구에 전시한 주력 판매 상품 삼성과 엘지 전자제품들을 보며 마트에 들어설 수 있었다. 1989년에는 남편의 집 안에서 끓이는 된장 냄새나 김치의 마늘향조차 괜스레 미국인들의 눈치가 보였는데 이제는 진열대에 놓인 수없이 많은 종류의 토종 한국 된장과 김치를 경기미와 함께 사들고 조카 집으로 와서 당당하게 된장찌개를 끓이고 김치를 먹으며 넷플릭스에서 방영하는 오징어 게임을 보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1989년 왔을 때 LA의 코리아 타운도 가보았다. 한국인 특유의 부지런과 성실, 강한 인내심으로 얼마나 힘겹고 억척스레 미국에서 한국인의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는지를 그곳에서 보았다. 하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의 고달픔이 느껴져 어쩐지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2021년 나는 메릴랜드에서 또 하나의 코리아 타운을 보았다. 이번에는 아픔보다 자랑스러움이 더 컸다.

그동안 나는 메릴랜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딸의 남자 친구였던 사위에게서 였다. 두 번째 들은 것은 매스컴에서였다. 메릴랜드 주지사 래리 호건이 코로나 팬데믹이 터진 후 발 빠르게 한국의 코로나19 검사 50만 회 분량의 진단키트를 사 갔고 주지사 부인 유미 호건이 한국인이라는 뉴스였다.

메릴랜드에 와서 딸의 결혼 피로연을 치르고 나는 한국의 위상을 높여주고 있는 많은 한국인들을 만났다. 한국인의 이민 발자취를 되짚어 따라가 보기도 했다.

그리고 한 달 후, 메릴랜드를 떠날 때쯤 나는 메릴랜드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지금부터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