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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터 Mar 01. 2022

코로나에 걸렸다!(1)

코로나에 걸렸다!

특별한 만남이 아니면 거의 집을 벗어나질 않고 조심조심 코로나 시대를 견뎌내고 있던 내가!



며칠 전 남편과 함께 지인의 장례식장에 갔다. 

지극히 건강하고 활발했던 분이었기에 부고장을 받았을 때 충격도 컸다. 

예전에는 텅 비던 장례식장이지만 문상 온 사람들이 많았다. 워낙 갑작스러운 죽음이라 많이들 놀랐고 그래서 더 찾아온 거 같았다. 코로나 사태 초창기에 사람들은 장례식, 결혼식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조심하고 가능하면 가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 확진자가 10만을 찍고 17만 전후를 오르내리자 오히려 경각심이 무뎌진 거 같았다. 이 정도로 쏟아져 나온다면 언제 어디서나 확진자를 만날 수 있고 아무리 조심한다고 피할 수가 없지 않은가, 라는 얼마간 자포자기의 심정도 있었을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친하게 지내던 A를 만났다. 문상을 끝내고 자리에 앉았다. 4인 테이블이지만 2인씩 앉게 거리두기를 하고 있었다.  남편 앞에는 다른 사람이, A는 남편 옆 테이블의 내 앞에 앉았다. 

세 사람은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식사는 하지 않았지만 마스크를 벗고 음료수를 마셨고 간간이 대화에 끼었다.  내 앞에 앉은 A 와는 부부간에 친하게 지내던 터라 부인과 자녀들의 안부도 묻고 이야기를 했다. 



 다음날, 전화가 왔다. A가 돌아가는 길에 보건소에 들러 검사를 했는데 오늘 양성이라는 통고가 왔다고 한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나는  A의 초밀접접촉자가 아닌가. 바로 앞에 마주 앉아 있었고 장례식장 탁자는 원래 폭이 좁아 마주 앉아 음식을 먹으려 서로 허리를 조금이라도 숙이면  50센티도 안 될만큼 가까워진다. 그리고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 잘 안 들려 나는 그의 입 가까이 귀를 가져가기도 했다. 남편과 A도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대각선 방향이었고 한 테이블에 한 명씩 앉게 되어있다 보니 거리도 족히 1미터는 넘었다. 

하지만 내 머리에 먼저 떠오른 건 남편의 안위가 아니라 손녀였다.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이 하는 사람은 손녀이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내가 픽업하고 간식을 챙겨주고 같이 놀아준다. 하지만 손녀는 백신도 맞지 못했다. 

만에 하나 나 때문에 손녀에게까지 감염된다면 나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A는 그 전날 다른 모임에도 갔다 왔고 약하게 몸에 이상을 느꼈다고 했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장례식장에서 나오자 바로 보건소로 간 것이다.  A가 남편이 아니라 내 앞에 앉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고 하루도 안 지내서 알게 되어 더 다행이었다. 글쟁이인 나야 원래 거의 집 컴퓨터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던 터였다. 만일의 경우 집안에 틀어박혀 있어도  큰 지장은 없지만 남편은 발이 묶이면 곤란한 일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즉시 마스크부터 꼈다. 아들 내외에게 상황을 이야기하고 내 근처 오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남편과 나는 집에 있는 자가진단키트로 검사했다. 코로나 사태가 터진 후 일주일에 반 이상은 재택근무하는 아들의 회사에서 보내준 것인데 내가 사용하게 될 줄 몰랐다. 

다행이었다. 둘 다 음성이었다.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 음성이었다가 나중에 양성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미크론이 우세종이 되면서 방역지침도 바뀌었는데 예전에 14일이던 자가격리법이 7일로 단축되어있다. 나는 다른 오미크론 확진자들과 같은 일주일 동안 스스로 자가격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사이에도 체크해서 계속 음성이 나오면 일찍 끝낼 수도 있었다. 코로나의 증상도 전혀 없었고 자가 키트는 음성이었지만 확실히 해야만 했다. 손녀를 위해서.


 평소 작업실로 쓰고 있던 작은 방에 나를 가두었다. 잠은 물론 밥도 방에서 따로 먹었다.  하지만 저녁 준비는 여전히 내가 했다. 나는 음성인데 맞벌이인 며느리가 돌아와서 피곤한 몸으로 저녁을 하게 할 수는 없었다.

밥이나 국은 뜨거운 불에 끓으니 설사 내가 양성 환자라 해도 바이러스가 살아남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을 위해 손에 비닐장갑을 끼고 그릇들을 만졌다. 실수로 내 손이 닿게 되면 즉시 알코올로 닦았다. 그리고 식구들이 들어오면 우렁각시처럼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냉장고 속의 반찬은 며느리나 남편이나 아들이 직접 꺼내도록 했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손녀 픽업도 예전처럼 했다. 바깥이고 마스크에 모두 두꺼운 패딩 코트를 입고 있으니 살을 맞댈 일도 없었다. 혹시 싶어 나갈 때는 장갑을 끼고 나가 아이와 살이 닿는 일이 조금도 없도록 차단했다. 손녀 픽업이 유일한 외출이었고 그 외엔 내 방 안에만 있었다. 

가족들은 증상도 없고 음성인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들 했지만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에 조심하는 게 옳다고 했다.

 손녀는 늘 같이 놀아주던 할머니를 만날 수없어 속상해했다. 아이에겐 코로나라고 하지 않고 다리를 다쳐서 나가질 못하고 아프니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다.

"할머니 언제부터 같이 놀 수 있어요?"

"세 밤만 더 자고 같이 놀자."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오일 정도 자가격리하고 그때도 음성이면 안심해도 될 거리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사흘째 되는 날 다시 해본 진단 키트

두 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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