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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Sep 14. 2015

바다 쪽으로 한 뼘 더

꿈꾸는 제주2 <남원포구-쇠소깍-외돌개-월평포구>

  순간, 갈매기 한 마리가 ‘끼룩’하고 울음을 떨군다. 바다의 둥지, 포구에는 항상 삶의 신산함이 배어 있다. 만선을 꿈꾸고 떠났던 배들이 빈손으로 돌아오는 날도 있었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폭풍우를 만나 상처만 가득 안고 파도에 실려 온 날도 있었을 것이다. 출어를 하지 못한 날들이 길어지며 생계를 걱정하는 사내들이 흐린 주점에 앉아 있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선지 이 둥지에서는 물큰한 슬픔이 느껴진다.   

  

  남원포구에서 쇠소깍을 향해 가는 길, 에메랄드빛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 중 하나라는 큰엉 산책로. 바다와 숲이 절벽을 경계로 만난다. 걷는 내내 옆구리에서 파도가 속살거렸다. 멀리 지중해풍의 콘도들이 야자수림과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이루고 있었다. 시야가 닿는 곳마다 이국적인 풍경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덩그마니 서 있으면 마음이 한껏 가벼워지고 배낭에는 흰 구름이 가득했다. 낯선 여행자를 만나도 말문이 저절로 트일 것 같았다. 누가 이 바다를 앞에 두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수소를 가득 채운 풍선이 아니라면 다행일 것이다.     

  

  마을올레에서 다시 해안으로 빠져나오는 길에서 해녀 할망을 만났다. 등이 기역자로 굽은 할망. 물질을 하려고 작은 수레에서 물것들을 내리고 있었다. 주름이 가득한 할망의 청동빛 얼굴과 거친 손아귀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내 마음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할머니, 집에서 쉬시지 왜 이렇게 힘든 일을 하세요?” 

  물음 같지 않은 물음을 던지고 나니 내 속이 더 아렸다. 더 이상 저 시퍼런 바다가 할망을 받아들이지 않고 내칠 것만 같았다.

  “집에 있으면 뭐해?”

  “너무 힘드시잖아요.” 

  “물에 들어가면 밥맛도 좋고, 용돈도 생겨서 좋아.”

  그러고는 다른 할망들이 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며 두리번거리는데, 물질을 하고 있는 해녀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외떨어져도 좋을 일’이라고 어느 시인은 그랬다. 그러나 파도가 사납게 일렁이는 저 바다에서는 ‘외떨어지면 안 되는 일’ 같기만 했다. 녹슨 못처럼 굽은 할망의 등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곧게 펴주는 바다. 그 바다에서 할망들이 바다의 깊은 숨을 건져 올리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물가에 가지런히 벗어놓은 고무신을 바라보았다. 마치 어떤 의식처럼 다가왔다. 유년 시절 나는 몇 날 며칠 혼곤한 꿈을 꾼 적이 있었다. 내가 자주 놀러 가던 저수지에서 사람이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한밤중에 전해 들었다. 무섭고 떨렸다. 차마 현장에는 가지 못하고 어두컴컴한 저수지를 멀리서 바라보니 횃불들이 이글거리며 바쁘게 오갔다. 그리고 누군가 전해주던 ‘구두를 가지런히 벗어놓았다’라는 말. 나는 ‘가지런히’라는 말 속에는 단정한 마음뿐만 아니라 운명 앞에서 더 이상 타협을 거부한 단단한 마음도 들어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가지런히 벗어놓은 고무신을 보고 있자니 사나운 물살 속에서 물질을 하는 할망들의 비장함을 읽는 것 같아 숙연해졌다. 굶주릴 수 없으니 일을 할  수밖에.     


  굶주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육신은 생존을 위해 음식을 먹고, 자아는 인정이나 성취감 따위를 얻음으로써 굶주림에서 벗어난다.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떠나 온 이 길 위에서 나는 얼마나 허기져 있는가를 깨달았다. 그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즐기면서, 절대가 아니면 얻지 못하는 것들을 얻으려 하고 있는 내 자신이 안타까웠다. 무엇이 무서운지 바다 쪽으로 한 뼘을 더 가지 못하고 있다. 허연 발톱을 드러낸 파도가 무서워 낭떠러지에 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에 나를 송두리째 바칠 수 없는 나약함이 싫다. 고통의 향기가 나지 않는 나의 밤은 그래서 늘 어둡기만 하다.    

 

  서귀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바닷물과 민물이 합수하면서 절경을 빚어낸 쇠소깍에서 6코스를 시작했다. 물빛이 짙고 깊었다. 지금은 테우를 오갈 수 있게 밧줄을 매어놓았지만 먼 옛날에는 용소라고 불렸다니 범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디를 가든 제주의 지형은 물을 얻기가 어렵다. 계곡마저도 물을 담아두지 못한다. 옛날에는 한 동이의 물을 얻기 위해 여인네들이 허벅을 지고 먼 거리를 걸었을 터. 그래서 용천수가 터져 소를 이룬 이곳은 마을 사람들에게 큰 축복이었으리라. 이 물길 끝에 효돈 마을이 있는데 아마도 유명한 효돈 감귤은 이 물맛과 연관이 있을 성 싶었다.     

  보목동을 지나며 인상 깊은 집을 보았다. 빨간 우체통이 있고 밧줄 한 가닥을 걸쳐 놓은 초록지붕의 집. 나무 계단을 밟고 내려가면 작은 대문이 있고 크고 작은 꽃나무들이 바다를 내다보고 있었다. 돌담 너머로 불어오는 해풍을 맞으며 밥을 먹고 꿈을 꾸는 이 집 주인은 분명 시심이 풍부한 사람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도 아담한 집에서 꽃을 가꾸고 텃밭을 일구며 소박하게 살고 싶은 꿈이 있다. 근사한 전원주택이 아니라 사람 냄새가 밴 농가. 마당을 쓰는 일과 가축의 먹이를 주는 일과 고샅길을 오가는 일들이 나를 행복하게 할 것 같다. 그래선지 여행을 하다 이런 집들을 만나면 마음이 저절로 기운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생진 시인의 보목동이라는 시가 바로 이 집을 노래한 것이었으니 시심을 끄는 풍경들은 무엇이 달라도 다른 것이다.   

  

  제주 남부 해안은 기암괴석과 바다가 어우러진 산책로가 매력적이다. 우연히 만나는 칸나와 돌탑들, 어디에 서건 멋진 바다를 배경으로 추억을 남길 수 있다. 보목동을 지나고 서귀포에 가까워지자 이중섭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설렜다. 이중섭은 오래도록 내 정신을 휘감았다. 내가 그림에 뜻을 둔 건 아니었지만 그를 통해 인간의 내면에 이르는 길을 알고 싶었다. 고독과 절망으로 점철된 그의 생애를 읽으며 나는 희미하게나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바다를 끼고 돌던 길이 시내로 접어들어 이중섭 거주지로 안내했다. 이중섭 미술관 바로 아래였다. 돌담을 기어오르는 덩굴식물들, 정갈한 초가지붕과 소담스러운 마당이 여행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중섭이 물고기와 아이와 게와 아내와 열한 달을 살았던 작은 방. 세상의 모서리에서 겨우 삶을 지탱하면서도 사다리 하나면 하늘이라도 오를 것 같았던 가난한 화가의 행복한 시간들을 떠올렸다. 마루에 앉아 섶섬을 바라보며 막막한 시절을 견뎠을 이중섭의 늑골과 은박지들. 삶은 외롭고 슬프고 그리운 것, 그리하여 나는 바다 쪽으로 한 뼘 더 마음을 기울여 살기로 했다.     


  ‘미루나무’라는 찻집에서 유자차 한 잔을 마시며 바다 쪽으로 한 뼘 더 기울인 마음이 무엇일까 다시금 생각했다. 길 끝에 서서 한 뼘을 더 나아가면 바다다. 발이 젖는다. 뭍의 경계를 넘어 바다로 나아간다. 빠져서 허우적거릴 수도 있고, 그 바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 경계를 두려워하고 있다. 흔들림 없는 일상, 안정적인 삶이 깨질까 봐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다. 시가 정체되어 있다면 아마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좀 더 치열해지려면 날것들에게 가까워져야 하고, 기왕에 가진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변화무쌍한 바다에 몸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서귀포 항을 뒤로 하고 외돌개에 이르니 관광객들이 붐빈다. 해안에 몸을 담그고 있는 외로운 돌기둥 하나가 사람을 부르고, 돈을 부르고, 시간을 부른 것이다. 그래, 기념사진이라도 찍어야지. 나도 그들 틈에 묻혀 앵글을 들이댔다.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보았던 해안가의 수많은 돌과 바위들을 생각했다. 스토리가 없어 주목받지 못한 것들이지만 그들이 모여 아름다운 해안의 절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름 없는 군중들처럼 수억 년을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이름 하나 얻자고 쌈박질이나 하는 인간들이 저 바위보다 더 낫다고 허세를 부릴 일이 아니다.     

  주어진 길에 매이면 그 또한 나를 놓아버리지 못하는 것, 집착을 버리기로 한다. 나이 들어가며 스스로 달라졌다고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버리는 일에 익숙해진 것이다. 아직도 내 영혼은 납덩어리를 매단 것처럼 무겁지만 언젠가는 새털처럼 가벼워져 돌아갈 것이다. 법환포구를 지나며, 서건도 앞을 지나며, 무겁고 지친 다리를 끌고 가자니 풍경들이 대강 스쳐 지나간다.     


  강정마을도 그렇게 지나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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