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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Sep 15. 2015

피아노가 된 여행자

꿈꾸는 제주4  <무릉생태학교-용수포구>

  내 몸이 피아노처럼 울어댑니다. 미세한 관절들이 높고 낮은 건반을 하나씩 눌러대더니 급기야는 화음으로 바뀝니다. 싫지 않은 이런 증상을 가끔 느끼곤 하는데 나는 그것이 순전히 바람 탓이라 여깁니다. 꽉 짜인 일과표 속에서 내 손목을 잡고 어서 나오라고 재촉하는 바람. 어디든 그를 따라나서면 꽃과 마을과 숲과 새를 만나게 해줄 것 같은 바람. 오늘도 바람의 손에 이끌려 길 위에 섰습니다.     


  누군가 걸어간 길이고 또 누군가 걸어갈 길입니다. 사방으로 열려있으나 비바람과 폭설에 지워지지 않는 길입니다. 이 길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태어나고 죽습니다. 미물이라고 여기는 돌 하나,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도 생각으로 태어나고 생각으로 죽습니다. 차귀도에서 태어난 바람이 신도 앞바다 거대한 도구리에서 스러집니다. 바람은 다시 그곳에서 다른 질감과 형상으로 태어나 모슬포 쪽으로 달려갑니다. 나는 소멸 쪽에 보다 가까운 마음으로 길을 걷습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사라지는 것들은 모두 형형한 눈빛을 남깁니다. 그 눈빛을 대하는 순간 내 삶이 투영되기 시작합니다.     

  언제 어느 지점에서 가던 발걸음을 딱 멈추게 될지 아무도 모르고 삽니다. 구순이나 되는 나의 노모도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는 길이고 세 살 박이 손녀도 깡총거리며 걸어가고 있는 길입니다. 한없이 걸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지만 나도 모르게 늘 멈춰 선 자세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주가 중심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계절이 바뀌고 사물과의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사는 것입니다. ‘이게 아닌데.’ 하며 깨닫는 순간이 있지만 고무줄 같은 탄성으로 원래의 무지한 상태로 돌아오곤 합니다. 나의 깨달음이 이렇듯 항상 빈약하고 일시적이어서 불만입니다. 화두 하나 품고 불철주야 수련하는 스님이 아니니 오지랖이 좁은 내 형편을 탓할 수밖에 없습니다.     

  살다 보면 외로움이 깊어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나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가 내 주변을 맴도는 것 같고 희미한 불빛 아래 홀로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생각, 늦은 밤에 책상 앞에 오롯이 앉아 있으면 좀처럼 내 마음의 파문이 가라앉지 않습니다. 사실은 이 순간이 인간에겐 가장 소중한 시간입니다. 존재의 근원을 찾아 여행을 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단순하지만 누구도 명쾌하게 답을 내리지 못하는 삶에 대한 의문입니다.     


  무릉2리에 있는 생태학교에서 시작해 용수포구에 이르는 18킬로미터의 짱짱한 길을 걷습니다. 몸은 여전히 피아노처럼 울어대나 조율을 잘 해야 합니다. 내일은 한라산, 모레는 사려니 숲을 가려고 계획을 세웠으니 각오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가장 큰 걱정은 타고난 저질 체력입니다. 어느 지점에 이르면 종아리에 알이 생기고 그 알에서 묵직한 바위 하나가 태어납니다. 올레길을 걸을 때마다 만났던 끈질긴 놈입니다. 조금만 걸으면 쉬었다 가자고 애원하고 심할 때는 아예 땅바닥에 딱 달라붙어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먹거리도 걱정입니다. 제주행 첫 비행기에서 내려 시외버스터미널 주변에서 흑돼지 두루치기로 아침을 먹기는 했으나 점심을 먹을 장소가 있을지 없을지 모를 일입니다. 운이 좋으면 간이식당이라도 만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내처 가던 길을 갑니다. 대체로 포구에는 요기할만한 식당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때를 잘 맞춰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어서 대비한다고 한 것이 고작 생수 2병에 초콜릿 2개 정도입니다. 마땅히 김밥을 살 데도 없고 빵도 싫으니 행운을 믿어야지요.      

  돌담과 바다와 오름이 어우러진 제주의 길은 샐러드 같습니다. 바람이나 햇살은 소스나 다름없습니다. 맛이 참 오묘합니다.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쌉싸름한 머위 맛도 아니고 새콤달콤한 초고추장 맛도 아닙니다. 파란 하늘에 배인 구름 문양을 닮은 맛이라고나 할까. 아무리 먹어도 포만감이 들지 않고 신선하기만 합니다. 아삭거리는 식감이 일품입니다. 아무튼 채식주의자가 좋아할 만한 맛입니다. 이런 음식을 어디서나 쉽게 먹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몇 달 전부터 예약하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내 발로 걸어야만 만날 수 있는 음식입니다. 나는 오늘 이 자연이라는 밥상에서 특별한 샐러드 맛을 만끽하며 평범하지 않은 시간을 맞고 있습니다.     

  참 오랜만에 금빛으로 출렁이는 보리밭을 보았습니다. 오름을 지나는데 무연히 나타난 것입니다. 이런 속살을 숨기고 있었다니요. 몸이 또 한 번 울어댔습니다. 저 어디쯤 화구를 펼쳐놓고 고흐가 앉아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굶주린 영혼 말입니다. 전기를 세  번쯤 읽었던 이가 바로 고흐입니다. 생과 사를 맞바꾼 고독과 예술을 향한 치열함에 몸을 떨었습니다. 거기에 전혀 비할 바가 아니지만 내 영혼은 너무나 사치스럽고 기름집니다. 기름틀에 넣고 짜면 기름이 한 말들이 통에 넉넉하게 차고도 남을 겁니다. 그럭저럭 관계를 맺고 사람 흉내를 내면서 살고 있으나 발가벗은 나를 만나면 정말 부끄러워집니다. 이기심과 가식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성실이라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살아왔지만 그것도 모두 허울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싶어집니다. 한마디로 너무 가볍습니다. 가벼우니 이리저리 바람에 흔들리고 내 갈 길을 굳건히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빨랫줄에 걸린 몇 켤레의 양말을 보는 순간 살아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모든 것이 다 경건해집니다. 아침에 일어나 양말에 내 발을 집어넣는 순간 ‘아, 오늘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그런 생각도 없이 매일매일 죽은 나무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고 싶어집니다. 양말은 저렇게 빨랫줄에 걸려야 제 할 도리를 다 한 것입니다. 밥을 벌러 다니던지, 놀러 다니던지, 열심히 몸을 움직여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나와 같은 방향으로 오십 대 부부가  앞장서 가고 있습니다. 정자 그늘에서 처음 만났는데 둘이서 사이좋게 소주잔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소풍 나온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런 편이 아닙니다. 놀멍, 쉬멍, 걸으멍 하라는데 그게 맘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매번 아내에게 질책을 받는 게 ‘왜 그리 급하게 가느냐’는 것입니다. 습관입니다. 연애할 때도 그랬으니 몸에 배인 조급증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나저나 그들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을까, 생각하니 애틋해집니다. 이런 곳에서 오가는 말들은 확실히 샐러드처럼 식감이 좋습니다. 상대를 향한 말이건, 혼잣말이건 가다 꼬이거나 엉키지 않고 아삭아삭 씹힙니다.     


  혼자서 나와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는 중년의 여자를 보았습니다. 작은 배낭을 멘 그녀의 뒷모습을 말입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생각하니 아련해집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와서 부려야 할 마음이 얼마나 많다는 것일까요. 꼭꼭 여며야 할 무른 마음이 또 얼마나 많다는 것일까요. 혼자서 가는 길은 달의 뒤편 같습니다. 만질 수도, 건넬 수도 없는 마음 말입니다.  그녀가 걷는 길과 내가 걷는 길의 경계에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풍광이 시원스러운 수월봉과 당산봉과 갈매기 떼가 절정인 생이기정길을 지나 자그마한 용수포구에 이르렀습니다.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귀국하던 길에 표류하다 도착한 포구랍니다. 언덕 위에 세워진 이국적인 성당이 바다를 향해 열려있습니다. 그래, 여기까지 왔구나. 내 몸도 표류하다 기착한 것처럼 다시 울어댑니다. 나는 얼마나 먼 곳에 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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