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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Sep 15. 2015

시간 여행

꿈꾸는 제주5  <한라산>

  바람이 먼저 내 몸을 씻긴다.      

  누군가의 부재에 늘 가슴 한편이 저리듯 히말라야, 알프스 같은 설산은 내게 그런 존재다. 신들의 땅, 가고 싶으나 갈 수 없는 곳. ‘가고 싶다’라고 주문을 외면 넌 ‘이래저래 안  돼’라는 메아리가 들려온다. 그런 까닭에 높은 산은 말할 것도 없고 근교의 야트막한 산까지도 겨울 산행은 멀리했다. 모처럼 작정을 하고 한라산 겨울 산행에 도전했으나 제주행 하루 전에 대설주의보가 내렸단다. ‘이래저래 안 되네’ 실망 반 자포자기 반으로 비행기 표를 해약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 한라산이 빗장을 풀었다는 소식이다. 풀었던 배낭을 다시 꾸려 내친김에 밤하늘을 날아서 제주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 홀로 이거나 서넛이거나 겨울 산행 채비에 여념이 없는 성판악 탐방로. 몸을 구부려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하고 나니 비로소 겨울 한라산에 오른다는 실감이 난다. 고작 몇 센티미터 눈만 보던 내 눈이 휘둥그레진다. 일 미터라니. 전문 산악인도 아닌 내가 알피니스트처럼 묵묵하게 눈길을 걸어 정상에 오를 수 있을까. 앞선 사람들이 서슴없이 출발한다. 떠밀리기라도 하는 양 나도 엉겁결에 걷기 시작한다. 아이젠 착용도 처음이고 눈 덮인 산을 오르는 것도 처음이다. ‘이래저래 걱정’이 많아서 도전해보지 않은 첫 경험이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잔잔하다. 청량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기분 좋은 시작이다. 다져진 눈길에 아이젠이 쏙쏙 박힌다. 오른발이 눈길을 움켜쥔 사이 왼발이 동력을 얻어 보폭만큼 전진하며 눈길을 먹어치운다. 투명한 소화기관 속으로 눈길이 고스란히 통과한다. 신발에 고정한 날카로운 금속이빨 몇 개가 대견하고 고맙다.     

  미지의 길, 이 길을 맨 처음 걸은 사람은 누구일까.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길을 얼얼하도록 헤치고 간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이 피이-잉 소리를 내는 것처럼 마음이 울기라도 했을까. 휘청휘청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며 가쁜 숨을 쉴 때 허연 입김이 황소의 콧김처럼 세게 뿜어져 나왔을까. 일 미터를 믿지 못해 스틱으로 쌓인 눈을 찔러보니 손잡이까지 들어간다. 무언가 둔탁하게 닿는 것이 있다. 두터운 솜이불 아래 벌거벗은 나무의 무릎이 있고 꽁꽁 언 발가락이 있을 터. 타원형의 긴 잎을 가진 굴거리 나무들도 접힌 우산처럼 생기를 잃고 시들하다. 대설이 다녀갔다는 것이다.    

  1983년 12월 31일. 

  나에게도 대설이 다녀간 날이다.     

  아내와 결혼한 지 정확히 30년, 오늘은 결혼기념일이다. 숨을 참으며 30초 버티기 같은 게임이 아니다. 행복의 첨탑에 불을 밝히기 위해 수없이 꺼졌다 다시 살리기를 반복하며 살아온 세월이다. 손으로 헤아려도 서른이고 강산으로 헤아려도 세 번이다. 세찬 빗줄기가 가슴 저 밑바닥을 때리기도 했으며 따뜻한 햇살이 몇 날 며칠  비추기도했다. 결혼이라는 관습은 얼마나 다채로운 색깔을 품고 있는지 그것들을 하나씩 들출 때마다 멀미가 났다. 색깔의 멀미는 폭음을 부르기도 했고 후회를 만들기도 했다. 그것은 안락함과 불편함을 동반한 허기였고, 백지로 제출할 수밖에 없는 답안지 같았다. 젊었으니까. 스물다섯. 그 시절로 쳐도 빠른 결혼이었다. 거기다 첫아이를 안고 결혼식을 치렀으니 더 빠르다고 해야겠다. 친구들은 군대에서 짬밥에, 얼차려에 젊음을 몽땅 불사르고 있거나 직장을 구하느라 단내가 나도록 백방으로 뛰던 시절이었다. 내 소식을 전해 들은 친구들은 뭐가 그리 급해서 결혼을 빨리하느냐며 비통한 축하를 해주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꿈결 같고 운명 같다. 30년이라는 세월.     

  온통 순은으로 빛나는 산을 오르며 

  나는 이내 하얗게 타오른다.     

  눈꽃들은 천상의 화음으로 순례자의 마음을 흔든다. 음표 하나하나가 영롱하게 빛난다. 바람의 형상으로 혹은 구름의 형상으로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음악을 들려주는 축제. 숨소리조차 가벼운 리듬으로 얹힌다. 고도가 높아지자 나무들이 눈을 뭉텅이째 이고 있다. 눈송이가 나뭇가지에 내려앉는 순간 업히고 덮쳐서 거대한 부피를 가진 나무들. 이글루 안에서 에스키모들이 갓 잡은 생선을 맛있게 나누어 먹고 있다. 우람한 근육을 가진 설인이 성큼 걸어 나와 곳곳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워놓았다. 신들의 정원이다. 자연의 건축술은 정말 놀랍다. 아니 놀랍다기보다  이해불가할 만큼 오묘하다. 고사목 끝에 앉아 크고 작은 오름과 그 너머 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하얀 독수리는 어떻고, 눈보라 속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수천의 수도승들은 어떤가. 인간의 기도가 어떻게 거기까지 닿을 수 있겠는가. 신록이 우거진 나무들에게서 태양을 향해 무모하게 덤벼드는 허세가 느껴진다면 눈꽃으로 빛나는 나무들에게서는 순교자의 모습이 느껴진다. 다음 생을 위해 자신을 비우고 오로지 인고의 시간을 견디다 새봄을 맞는 겨울나무들. 그들도 시간 여행을 하는 것이다. 궤도를 수정하거나 속도를 늦출 수 없는 영원한 시간의 수레바퀴 속에서.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처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다시 되돌리고 싶은 일도 부지기수겠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삶이다. 하루를 두 번 살아보라 한다. 그렇다면 두 번째 사는 하루는 분명 첫 번째의 하루와 다를 것이란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실수했던 일을 온전한 일로 바꿀 것이고, 후회했던 일을 만족스러운 일로 바꿀 것이다. 그렇다고 완벽한 하루를 살 수 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시간 앞에서 우리는 누구라도 예외가 없는 불완전한 유기체에 불과하다. 결국은 매일 매일 주어진 시간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 여행이다.     


  나이가 들수록 관념에서 멀어진다. 추상보다는 구상에 가까워진다. 새싹을 보아야 봄이 온 걸 알겠고 낙엽이 져야 한 해가 가나보다 생각한다. 천상의 화음 같은 눈꽃들을 보니 신의 존재를 믿게 된다. 결혼에 대한 개념도 ‘반쪽과 반쪽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에서 ‘아이들과 한 밥상에서 숟가락 달그락거리며 밥을 먹는 것’으로 바뀌어 간다. 살아오며 간이역이 많았다. 그곳에 내릴 때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맛있는 간식을 많이 사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 홀로 침잠했던 시간들도 미안하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꽁지가 예쁜 새끼들과 함께 날았던 창공도 아름답고, 흐르는 시간 속에 띄워 보낸 내 영혼의 노래도 아름답게 들려오는 것이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서른 번째가 아닌 서른 번의 해를 살았다는 것이.

  또 한 번의 대설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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