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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Sep 19. 2015

물빛으로 편지를 쓰네

꿈꾸는 제주9  <가파도>

  김영갑 갤러리에서 먹먹했던 가슴을 모슬포에 풀고 다음날 가파도를 향합니다. 날씨는 쾌청합니다. 이런 날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일이니 오늘은 그야말로 복 받은 날입니다. 멀리 한라산의 완만한 능선과 손으로 잡힐 듯한 산방산의 위용이 한 폭의 그림입니다. 점점 멀어져가며 와이드로 펼쳐지는 모슬포의 풍경이 눈꼬리를 길게 잡아당깁니다. 가파도는 청보리 축제가 아니어도 마라도와 더불어 꼭 가보고 싶었던 곳입니다. 섬 속의 섬이니까요. 섬을 생각하면 한없는 그리움이 밀려옵니다. 짙은 물빛과 더는 나아갈 수 없는 바다 앞에서 오래도록 서 있고 싶은 이유인지 모르겠습니다.     

  가파도는 해발 20.5미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낮은 섬입니다. 무릎께도 차지 않는 이 낮음 속에는 휴식과 안락과 느림이 있습니다. 상동포구에서 할망당 쪽으로 가든 개엄주리코지 쪽으로 가든 하동포구에 이르고 그 곳에서 곧장 가운데로 가로질러 오면 다시 상동포구에 이릅니다. 느려야 두 시간 정도는 어느 곳이든 다 다녀올 수 있는 크기인 까닭에 굳이 안내판이 필요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행자들은 안내도 앞에서 어디로 갈지 망설이는 눈치입니다.     

  나는 춘자네 칼국수 간판이 보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집담과 밭담이 그동안 제주의 산야에서 보았던 것들보다 무척 아름답습니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한라산과 산방산이 배경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나를 뒤흔듭니다. 해안선의 검은 바위에서는 연신 파도가 부서집니다. 아무리 맞아도 아프지 않은 저런 따귀를 나는 맞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바위들은 잠들 수 없고 덩달아 섬도 깨어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하늘은 푸르고 배들은 한가로이 떠 있고 해안을 따라 걷는 내내 마음이 무릎보다 더 낮게 깔립니다.    

  

  고냉이 바위를 지나자 마라도가 지척입니다. 저곳 또한 바람처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만 가파도에서 바라보는 마라도는 이웃집 같습니다. 손을 흔들어도, 소리를 질러도 다 보고 들을 수 있는 거리. 하지만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는 거리이기도 합니다. 짝사랑이 이런 거리일까요. 더는 갈 수 없이 그저 그리움만으로 채워지는 간격 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문득 당신이 그리울 때면 이곳에 다시 오겠습니다. 시장에서, 영화관에서, 꽃이 지는 벤치에서 꿈꾸었던 당신.     

  보리밭이 장관입니다. 시골에서 자랐으니 보리밭이야 너무도 익숙하지만 물결을 일으키며 흔들리는 보리밭에서는 바람의 따스한 손길이 느껴집니다. 고운 빗으로 머리를 빗겨주는 여인의 손길 같습니다. 그러나 섬은 바람의 땅입니다. 폭군처럼 구는 날들이 많지요. 잠시도 머물지 않고 새로운 영토를 향해 달려 나갑니다.

    

  하동포구에서 곧장 가로진 길을 걸어오니 가파초등학교가 있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학교를 보고 여러 학교에서 근무를 했으나 이처럼 아름다운 학교는 보지 못했습니다. 지붕 보다 더 높게 자란 야자나무가 정원수로 서 있고 아담한 운동장은 잔디로 덮여 있습니다. 노랗게 칠한 벽들과 벽화들과 놀이기구들, 아이들은 저기서 무슨 꿈을 꾸며 살까요. 이곳에서 몇 해를 살아보고 싶어졌습니다.   

 

  지나간 시간들, 다시 오는 시간들을 맞이하고 싶어지면 정말 다시 오고 싶은 섬입니다. 유명하다는 가파도 짜장은 먹지 않아도 골목 민박집에 여장을 풀고 낮이면 포구에 나가 마라도를 바라보거나 한라산을 바라보고 싶어집니다. 감추어둔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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