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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Feb 15. 2016

내 어깨와 세월에 지고 온 것은 꽃이었더라

꿈꾸는 제주10 <조천만세탑-김녕-하도-종달바당>

  제주올레의 마지막 여정이라 생각하니 걸음마다 아쉬움이 짙게 배어나온다. 손바닥에 아롱거리던 물무늬도, 폐부 깊숙이 스며들던 곶자왈의 내음도, 어떤 마음이 간절하여 애월에서 만났던 시인들의 실루엣도 머잖아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을 것이다.     


  우도를 시작으로 올레를 걷기 시작한지 벌서 6년째. 아내와 나는 그 사이 여섯 살을 더 먹었고 여섯 해를 설렘과 기대 속에서 살았다. 말수가 많아지고 자연의 오묘한 맛을 느끼는 새로운 미각을 얻었다.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으면서도 가장 겸허한 자세로 내가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건강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행복했다.   

 

  조천 만세동산에서 마음을 추슬러 김녕 포구를 향해 걷는다. 누군가는 물가에 앉아서 자신의 생을 관통해가는 잠언을 기록하고 있으리라. 닻을 올린 마음은 벌써 짙푸른 수평선에 닿아있고 물이 들기 시작한다. 억새들의 수런거림과 돌담 사이에 핀 야생화에 여행자의 눈길을 던져주고 돌아서니 어김없이 바다다. 무지개떡처럼 여러 가지 색깔을 띠는 10월의 바다. 청량한 공기가 몇 겹 습한 껍질을 다 씻어낸 바다. 나는 저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는 울음을 기억하지 않으려 애쓴다. 바다는 하늘과 한 몸이라는 듯 하늘에 최대한 가깝게 다가간다.   

    

  바다에서 사람의 시선은 모두 바다를 향한다. 홀연히 자신의 마음이 열리고 무엇에 홀린 것처럼 자신을 잃게 된다. 그러다 그런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기도 한다. 백사장에서 바다를 앞에 두고 우연히 함께 선 다섯 사람의 풍경이 있다. 노부부와 젊은이 셋, 노부부는 토라진 듯 보이나 실은 몇 십 년 익숙하게 살아온 모습 그대로다. 어머님은 쪼그려 앉아서 풀어놓지 못한 애환을 한가득 안은 채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고, 아버님은 뒷전에서 뒷짐을 진 채 비스듬한 자세로 적막한 시간이 부담스럽다는 듯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다. 연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이 부딪히는 짧은 순간을 애써 피하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연인의 친구 같은 여자는 손바닥으로 햇빛을 가리고 휴대폰 메시지를 읽느라 여념이 없다. 다섯이면 다섯, 열이면 열 모두 서로 다른 바다를 바라본다. 그러니 때로는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는 인간의 관계들과 파도처럼 부서지는 웃음들 속에서 우리는 항상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리라.    

  함덕의 바다는 유희하기에 더 없이 좋다. 하얀 백사장, 낮은 수심, 그리고 다양한 빛깔로 잔뜩 멋을 부리고 밀려오는 파도들, 제주는 남쪽보다 동북부 쪽에 훨씬 많은 백사장을 거느리고 있다. 서우봉을 오르며 한 폭의 수채화로 떠 있는 함덕의 바다를 다시 돌아본다. 저런 바다를 창공에서 감상할 수 있다면 얼마나 환상적일까. 서우봉에서는 커다란 새처럼 패러글라이딩이 한창이다. 저런 체험도 괜찮겠다 싶었지만 오래전 알았던 이웃이 패러글라이딩을 하다 유명을 달리했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전혀 내키지 않았다.    

 

  김녕 금속공예 벽화 앞에서 내 자신에게 묻는다. 내 어깨와 세월에 무엇을 지고 여기까지 온 것인가. 힘들다고 엄살 부리고 살았지만 도대체 무엇을 지고 오십 년이 넘도록 살아온 것인지 알 수 없다. 그저 빈 몸 같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한들 무엇 하나 내세울 게 없다. 한때는 신의 선물이라고 여겼던 자식들도 각자의 삶을 위해 떠나고, 부실해져가는 육체를 간수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으니 남은 게 하나도 없다. 그런데 그게 꽃이라고 고단한 삶을 위로하는 예술가가 있다. 물질을 하며 수십 년을 살아온 해녀의 삶이 꽃이란다. 다시 생각하면 어찌 해녀만 어깨와 세월에 꽃을 지고 왔겠는가. 나의 삶도 당신의 삶도 빛깔과 크기만 다를 뿐 다들 한 송이 꽃을 지고 온 것이 아니겠는가. 예술가는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우리네 어깨와 세월에 꽃 한 송이를 얹어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주민들을 설득해가며 담장마다 모노톤의 다양한 금속 벽화를 전시해놓은 김녕 예술가들의 열정이 여행자의 무거운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성세기 해변에 선다. 풍력발전기가 이국적 정취를 풍기고 있다. 거대한 바람개비가 돌아갈 때마다 하늘에 생채기가 날 것 같지만 온전한 그대로다. 바다와 억새와 함께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눈부신 가을을 읽는다. 나의 눈부신 생을 읽는다. 누구에게라도 먼저 인사를 건네도 좋을 시간들. 홀로 가는 길은 필연코 외로움을 동반하지만 외로움이란 에너지를 스스로 담금질 할 수 있는 기회이고 그것에 집중할수록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어느 진화의 골목에 선 듯한 돌담길에서 문득 내 어깨와 세월에 지고 온 꽃 의 향기가 그립다. 그리고 월정 해변에 이르러 이국적 정취의 정점을 찍는다. 도로에 즐비한 카페들과 관광객들. 바다가 사람을 부르고 사람이 또 사람을 부르는 곳이다.  

  세화 오일장에서 단감 한 봉지를 사서 먹는다. 달다. 시장구경 만큼은 빠지지 않고 하는데 아무래도 그곳은 내 유년의 끈이 닿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배고팠던 시절, 힘들게 살았던 시절, 돼지고기 한 점과 국수 한 그릇이 내 삶을 지배하고 있던 시절. 그래선지 시장에서 만나는 소리들과 빛깔들과 냄새들은 내 깊고 어두운 통로를 단숨에 통과하여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려준다. 이런 게 고맙고 살가운 일이다.  

  

  그리고 세화 해변에서 또 우연찮게 벨롱장을 만난다. 반짝 한 시간만 열리는 장터. 관광객들은 이 장터를 보기 위해 한 달에 두 번, 그 시간에 맞춰 달려온다는데 나는 그야말로 20코스 마지막 장소에서 조우하게 된 것이다. 제주에 예술가들이 많다는 건 익히 들었지만 벨롱장에서 만난 갖가지 물건들을 보면서 그들만의 향기를 느낀다. 수작업으로 만든 액세서리, 생활소품, 빈티지 옷들 하며, 손수 그린 그림엽서나 먹거리들이 게스트하우스 마당에 즐비하다. 여남은 살 먹어 보이는 소녀가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는 조가비 목걸이를 펼쳐놓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그 아이의 마음에 경제가 자라는 것인지, 예술이 자라는지 구분할 수 없지만 나는 예술 쪽에 방점을 찍는다. 조가비를 주워 깨끗이 씻어 말리고 세필로 채색을 하고 있는 그 아이의 빛나는 눈망울을 떠올린다. 자신의 삶에 대해 무언가를 이루어 가는 자유로운 생각들이 그들을 제주에 머물게 하고 빈한한 삶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마땅히 몸을 뉘일 곳이 없어 비교적 숙소가 많은 성산까지 버스로 이동한다. 둘째 날 밤, 소주 한 잔에 여독을 달래며 다시 이렇게 제주의 속살을 걸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다. 지나온 여섯 해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샐러드 같은 제주의 바람과 햇빛과 하늘, 새로 얻은 미각으로 나의 여생마저 맛보았던 길 위에서의 적요함. 제주는 사랑하는 이에게 쓰는 물빛 고운 편지처럼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간절한 곳이다. 아쉬운 마음에 아침 햇살에 휩싸인 성산 일출봉의 자태를 눈에 한 번 더 담고 마지막 21코스를 걷는다. 끝이어야 할 종달바당에서 세화리에 있는 해녀박물관까지.    

  반짝이는 물빛 너머로 성산을 카메라에 담는 여자의 앉은 그림자가 짙다. 그녀도 생의 갈피마다 쓸쓸함과 고즈넉함과 설렘을 간직해두고 싶을 터. 세월은 흐르고 서글프지만 우리는 점점 모든 것을 망각해가는 동물이 되어간다. 자신의 이름조차, 몸 냄새가 베인 집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낯선 곳을 헤매다 생을 마감하는 노인들의 안타까운 소식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내 어깨와 세월에 지고 온 것이 꽃이었으나 그 꽃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나를 다시 돌아본다.     

  그래, 사랑하자. 

  나를 힘껏 사랑하자. 

  지금껏 잘 살아온 거야. 

  근사한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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