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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Jul 04. 2016

제 몸에 깃든 것을 변주하듯이

강릉바우길3<굴산사가는길~바다호숫길>

  어제까지 비가 쏟아지더니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오늘의 실마리였다. 아침 여섯 시, 식사도 거른 채 부랴부랴 배낭을 챙겨서 자동차의 시동을 걸고 고속도로를 향해 달렸다. 두고 온 길이 그리웠다. 사육장 같은 서랍 속에 있다가 오랜만에 배낭 뒷주머니에 꽂혀 가는 수첩 같은 기분이랄까. 장맛비 뒤끝이니 땅은 젖었을 테고, 길이 지워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나는 귀 닳은 수첩에서 어떤 문장 하나를 꺼내 야금야금 씹으며 강릉을 향해 달렸다.    


  나는 나에게 물어야 할 게 아직도 너무 많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라고 묻지 않는다. ‘왜?’ 라고도 묻지 않는다. 이럴 때 가장 유효한 대답은 ‘그냥’이다. 걷는 것이 그냥 좋기 때문이다. 낯선 길에서 자가 동력만으로 어딘가를 향해 간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고 기대되는 일이다. 이름도 생소한 학산 오독떼기전수관 앞에서 바우길 6구간 걷기를 시작하는데 내 몸에서 무언가 술술 풀려나왔다. 옛날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처럼 서사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느낌이었다. 거기에는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자연과 수평선과 수직선의 교차가 있고, 자라고 버려지는 것들이 공존한다. 수많은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것들과 그것들을 인식하며 걷는 나의 모습이 하나의 풍경으로 어우러진다.    

  자두나무가 붉은 자두를 매달고 가로수처럼 늘어선 뚝방길은 어떤가. 동백처럼 툭! 떨어져 뒹구는 속울음을 지나쳐가는 나는 또 어떤가. 공들여 피었다가 한순간에 지는 꽃들이나 가까스로 맺혔다가 애꿎게 떨어지는 열매들이나 본연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들은 압화처럼 영원히 캐낼 수 없는 표정들을 가지고 있다. 나는 마른 감성을 비집고 솟아나는 시어에 몰두하면서 은밀하게 숨어있는 기표들을 붙잡으려 애썼다.  

   

  무릎까지 기어오르는 풀잎에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장현 저수지 길을 두 번이나 반복했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길에서 나뭇가지에 묶여있는 리본만큼 훌륭한 안내자는 없다. 리본이 보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저 그 길을 따라가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본이 보이지 않으면 한순간 혼란스러워져서 판단력이 흐려진다. 길을 잘못 들었나? 하는 의심이 든다. 아마 길들여진 인간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그간의 경험으로 보자면 길을 잃었을 때는 방향을 염두에 두고 큰 그림을 보아야 한다. 길은 길과 닿아있기 때문에 깊은 산속이 아니면 어디로 가든 목적지에 갈 수가 있다. 전국의 수많은 둘레길 모두 길과 길을 도상으로 이어놓은 것일 뿐 어디로 가든 하등 문제가 없는 것이다.    

  장현 저수지에서 잠깐 길을 놓쳤는데 연이어 모산봉까지 놓쳤다. 숲 속의 눅눅한 냄새와 신록을 벗 삼아 걸어야 할 길이었으나 아무려면 어때? 하는 심정으로 딱딱한 포장도로를 걸었다. 그러나 그 길에서도 내 마음을 움직이는 사물과 풍경과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 길이란 어느 곳으로 가던 아쉬움이 없는 것이다. 대로변에 이르기까지 리본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바다 방향을 보고 걸었더니 어느 순간 리본을 만나게 되었다. 그깟 헝겊조각 하나가 나를 위로하다니.     

  뜨거운 태양을 등지고 연어가 회귀한다는 남대천을 따라 걸었다. 강물은 붉고 붉은 강물은 붉어서 미안하다는 듯이 동해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복숭아 몇 알을 사려고 남대천을 건너 강릉중앙시장을 배회했으나 마땅치 않았다. 복숭아가 없어서가 아니라 좌판마다 오래된 장사꾼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구겨진 검은 봉다리를 사랑한다고 누구에겐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그것에 담기는 할머니의 정성과 선량한 끼니와 굽은 뼈마디를 말이다. 여행 중이라 가지고 다니기 무거워서 그런다고 복숭아 이천 원어치만 달라고 했더니, 오천 원 아니면 팔지 않는다는 당당함 앞에서 나는 입맛을 싹 잃고 말았다. 내가 찌질하고 멋쩍어서 뚜벅뚜벅 걸었다. 다시 남대천을 건너 시내를 벗어나니 비탈에 선 외딴 집이 눈에 들어왔다. 제 몸에 깃든 것들을 변주하듯이 드러내는 길이야말로 카멜레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남항진 해변을 거쳐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는 안목항 커피거리에 이르니 저녁참이었다. 여기가 해변이 맞나싶게 번화한 거리였다. 마치 제주 월정 해변처럼 멋들어진 가게들이 즐비하고 자동차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평소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내게 커피란 하나의 음료에 불과하지만 애호가들이 많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는 그저 음료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물길, 또는 꽉 쪼인 정신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윤활유가 아니겠는가. 생각해보니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산울림의 ‘찻잔’이란 노래를 좋아하던 시절 말이다. 진한 갈색 탁자에 다소곳이 앉아 누군가 와주기를 기다렸었다. 일없이 성냥개비 탑만 쌓으면서 시간을 죽였는데도 여전히 누군가는 오지 않았지만.     

  저녁을 먹고 바다 앞에 섰다. 노을이 스러지는 순간을 놓치지는 않았다. 호젓한 바다는 아니지만 불빛과 어우러진 파도소리에 피로가 말끔히 씻겼다. 그해 여름, 또는 강릉 밤바다로 기억될 순간들.     

 

  이른 아침, 송정 해변, 강문 해변을 거쳐 울창한 송림 속에 자리한 허난설헌 생가에 들려 경포 호수를 한 바퀴 휘돌아가는 코스가 좋았다. 주변 습지 공원에는 연꽃이 만개하여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아무도 꺾지 않은 연꽃들이 무너져서 연밥이 되고 사라진 손바닥이 되어 겨울을 나게 되리라. 바라보는 이가 없어도 살아가게 되는 오늘, 나는 내 기억속의 수많은 연 방죽을 떠올리고 그곳에서 낚시로 건져 올린 물고기들을 떠올리고 내 가슴을 달뜨게 했던 연꽃 같은 미소를 떠올렸다. 그리하여 뜨거운 발을 벗고 경포대에 올라 모처럼 달디 단 휴식을 맛보았다. 호수를 건너온 바람이 성능 좋은 제습기처럼 땀을 쓸어갔다. 달밤에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던 옛 선인들의 달은 도대체 얼마나 크고, 밝게 빛났을까.    

  바우길 5구간을 역으로 걷는 길, 안목항 커피거리에 비하면 경포 해변은 의외로 한산했다. 해수욕장 개장이 일주일 남은 탓도 있겠지만 짐작컨대 일요일 아침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학여행 차 경포를 방문한 적이 몇 번 있었고, 여행 삼아 몇 번 오기는 했지만 이곳에 오면 모래사장만 한번 밟고 낙산이나 속초로 갔던 기억이 났다. 유명한 곳인데 의외로 오래 머물지 않았던 데는 무슨 이유가 있긴 있을 텐데 아무래도 모르겠다.         

  송림을 걷고 있는데 한 여자가 둥글게 말린 철조망 건너 쪽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나와 다른 방향으로. 저곳은 바다에 더 가까운 곳인데 젖어 있지는 않았다. 그 여자가 보이지 않은 후에야 내가 거꾸로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 속의 행인처럼 사근진 해변, 순포해변 그리고 지난 번 종착지였던 사천진 해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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