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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Aug 27. 2016

구름 위를 거닐다

강릉바우길4<안반데기운유길>

  안반데기를 다녀온 후로 망에 담긴 고랭지 배추들을 보면 반가워진다. 배추 한 망을 사서 어깨 위에 들쳐 메고 오면 어쩐지 고마운 생각이 든다. 아이들에게 늘 그렇게 가르쳐 왔지만 그냥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었을까 반성해보곤 한다. 농산물이든 해산물이든 먹거리들이 내 입에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땀방울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고 사는 것이다.      

  우연히 보게 된 안반데기 풍경 사진 몇 장이 나를 홀렸다. ‘떡메로 쌀을 치는 안반처럼 우묵하면서도 널찍한 지형’이라는 지명도 그 홀림을 거들었다. 우연이란 크고 작은 가치를 떠나서 사람 사는 이야기를 부풀리는 효모 같다. 우연히 만난 사람, 우연히 보게 된 물건, 우연히 지나치게 되는 장소 등등. 예기치 않은 일들이 일어남으로써 삶이 다양해지고 다채로워진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도 우연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연일 폭염주의보가 발령중인데 강릉 바우길을 걷겠다니 내가 생각해도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온열 환자들의 수가 급증하고 재난문자가 매일 전송되는데 걷겠다고? 하지만 내 행복의 중심에 자리 잡은 두 발이 나를 밀어내는 데는 어쩌지 못했다. 그곳이 해변이건, 설원이건, 고산지대건, 걸을 수만 있다면, 건강이 허락만 된다면 내키는 대로 어디든 걸어가고 싶은 것이다. 지금, 여기의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을 꼽으라면 당연히 길 위에서의 시간이다. 그 시간만큼 나를 평화롭게 하고, 소소한 즐거움은 안겨주는 것은 없다.  

  해발 1,100 미터의 고산지대라 함은 구름과 가깝다는 이야기며, 화전민들의 피와 땀이 배어 있다는 이야기다. 구름 아래 전국 최대 규모의 고랭지 채소를 가꾸며 사람들이 신앙처럼 살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들으러 안반데기에 간다. 귀가 아니라 눈으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요령부득한 일이 아니라 가능한 일이다. 터만 남은 황룡사에서 탑을 그려보고, 풍경 소리의 파문을 보며, 저 화엄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다면 내 눈은 귀보다 더 밝아지는 것이리라.     

  한낮이고 폭염인데 주차장에 승용차들이 많다. 그러니까 갈까 말까 망설였던 내 마음은 사실은 지나친 걱정이었던 것이다. 차를 대고 두 시간 남짓 걸리는 코스를 따라 언덕길을 오른다. 서둘러야 할 길이 아니면 ‘어여, 좀 쉬어 가게.’ 그러면서 막걸리 한 잔을 권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길이다. 막걸리 한 잔을 받아 마신 후, 쓱 입을 닦고 먼 곳에 눈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 길이다. 그런 길을 걸어 뒤를 돌아보니 장엄하다. 구름이 뭉실거리는 푸른 능선과 이국적인 풍력발전기, 옷감 조각을 잇댄 것처럼 구불구불한 길들이 구획해놓은 배추밭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얼굴에서 눈만 커다랗게 확장되고 코와 입과 귀가 모두 사라진 느낌이다. 가시적인 거리에 존재하는 풍경들이라니.   

  그러나 초록빛 세상에 가까이 갈수록 단단한 자갈들이 눈에 띈다. 옥토가 아닌 박토다. 피땀으로 일군 밭에 모종을 일일이 하나씩 심어 물을 주고, 김을 매고, 약을 치며 한 포기 배추로 키웠을 것이다. 저 여린 것들이 수많은 밤과 낮을 연대하며 살아남도록 구름 위를 거닐었을 것이다. 허리 펼 틈도 없이 풀을 뽑고 있는 아주머니들의 등에 따가운 햇살이 꽂힌다. 내 땀방울과는 비교할 수 없는 뜨거운 땀방울들이 그녀들의 목덜미를 타고 넓적한 배춧잎에 뚝뚝 떨어지는 소리를 마음속으로 듣는다.  

    

  나는 그 아름다운 초록빛 세상에 눈을 뿌린다. 눈이 소복이 쌓이고, 길은 끊기고, 무지근한 구들장에 무명옷을 입은 아이들을 앉혀 삶은 감자와 동치미를 내놓는 어미를 떠올린다. 겨울이면 백석이 다녀갈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눈이 푹푹 나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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