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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Dec 19. 2016

온몸이 만개하는 눈길

강릉바우길5 <대관령 눈꽃마을>

  며칠 전에 영동지방에 큰 눈이 내렸지만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잔설이나 좀 보겠지 그런 생각으로 나섰는데 대관령에 가까워질수록 눈을 덮고 있는 산등성이들이 하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횡계 IC를 빠져나와 이면도로에 접어드니 눈길이다. 빙판길에서 죽을 뻔한 옛 기억을 살리며 조심조심 차를 몰아 도착한 곳은 눈꽃마을 산촌생태체험장. 여기서부터 둘레길 여정이 네댓 시간 정도니 느긋이 걸어도 오후 3시 정도면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동녘교를 지나 개천을 따라 걷자니 얼음장 밑으로 졸졸거리는 개울물 소리가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빙점을 꽉 물고 있는 갈대들도 동안거에 접어든 모습이다. 눈 덮인 땅의 굴곡마다 음영이 선명하여 마치 다른 행성의 지표면 같다. 바람의 흔적은 때로 아름답다. 언제나 찢고, 부수고, 쓰러뜨리는 것만은 아니다. 저처럼 땅에 생기를 불어넣고 존재하는 것들에게 크고 작은 의미를 부여한다.      

  목장에 이르는 언덕길을 오르며 능선에 선 나무 한 그루를 본다. 파란 겨울 하늘과 구름을 배경으로, 더 먼 곳의 산맥을 배경으로 선 겨울나무. 잔 가지들 사이로 조각난 하늘빛이 시리고 겨우살이들이 혹처럼 붙어서 기생하고 있다. 견디며 산다는 것. 그것이 운명이라 해도 수긍하며 산다는 것. 사람들에게는 고통이나 다름없는 것을 나무들은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묵묵히 받들어 산다. 

  가파른 언덕길인데 건초를 실은 트럭 한 대가 멈추더니 사내가 말을 건넨다. 

  "어디 가세요?"

  "눈꽃마을 둘레길 걷고 있습니다."

  "그래요. 정상 부근에서 오른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트럭이 덜커덩 후진하다 기를 쓰고 다시 올라가더니 건초가 조금 흘러내린다.  참 친절하다. 그렇다. 그냥 지나쳐도 무방한 일인데 숭늉보다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넨다. 언덕의 정상에 이르자 사내가 말한 대로  두 갈래 길이다. 왼쪽은 목장인데 출입금지 표시가 있고 오른쪽으로 둘레길 표지가 서 있다. 설목장, 캔터키 목장, 승마클럽 이런 지명들이 목장 지역에 들어섰음을 알려준다. 싱그런 오월에 이런 곳에 왔다면 초록들이 얼마나 반겼을까 생각하니 금세 오월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그러나 눈 덮인 겨울. 산짐승 발자국밖에 없는 숫눈을 밟으며 걷는 기분이라니... 이런 곳에 오면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세상의 일부를 가진 듯이 마음이 풍족해진다.  푹푹 빠지는 발이 흥겹고 허벅지에 묵직하게 느껴지는 긴장감이 심장 박동을 고조시킨다. 바람이 몰고 온 눈송이들이 쌓이고 쌓여서 생각의 늪을 만들어 놓는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니 발자국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멀지도 않은 거리를 이리저리 깊이를 재고 왔다는 증거다. 이해타산에 젖어서 사는 나의 습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럼에도 숫눈을 밟으며 왔다는 사실에 온몸이 만개한다.

  몇 년 전 한라산 겨울 산행을 한 이후로 나는 겨울산이 좋아진다. 겨울산은 소란스럽지 않아서 좋다. 고요히 침잠하며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모습이다. 하얀 눈꽃이라도 피우고 있으면 순수 그 자체이다. 사람은 그저 눈꽃 아래서 온갖 오욕에 찌든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런 까닭에 겨울산에 오르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고나 할까.

 작년 1월에도 태백산에 올라 눈꽃을 보았다. 그것도 예기치 않은 만남이었다. 지표 가까운 곳에는 잔설이 드문드문 있었지만 고도가 높아질수록 눈밭이더니 정상 부근에서는 나무마다 새하얀 눈꽃을 피우고 있었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는 주목에 핀 눈꽃보다 아름다운 꽃이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신록의 싱그러움도 좋지만 인고의 시간에서 피워 낸 눈꽃이야말로 황홀한 순간의 꽃이다. 

  

 사실 눈꽃마을 둘레길을 가려고 할 때부터 막연하게 혹시 그런 눈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나무들이 햇빛 찬란한 하늘을 우러러 서 있으니 때마침 눈보라가 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다행이라면 누군가 뒤따라 와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최초의 발자국을 찍으며 걷는 눈길과 이국적인 풍력기들 그리고 목장의 울타리들과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나를 한껏 들뜨게 한다는 것. 

  눈꽃마을 펜션촌과 캔터키 목장을 지나 다시 마을로 내려와 건너편 산등성이로 향한다. 이정표가 불확실하다. 인터넷 검색을 해도 오리무중이다. 주민에게 길이 아님만 확인받고 서성이다 방향만 보고 무작정 걷는다. 그간 바우길 걸을 때는 리본이나 표시물들이 언제가 필요한 곳에 있어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눈꽃마을 둘레길 표시물은 여행자에게 조금 인색한 편이다. 갈림길에 리본만 있어도 안전한 것을 리본도 없는 길, 거기다 사람 발자국도 없는 것은 미로나 다름없다. 

  운 좋게 푯말을 발견하고 산을 오르는데 발이 푹푹 빠진다. 나뭇가지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다. 과연 이 길이 맞나 의심이 든다. 흥겹던 발걸음에 바위가 실리고 땀이 비 오듯 한다. 종아리가 당기고 골반이 뒤틀린다. 히말라야를 오르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왜 그리 무거운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된다.

  불확실한 길이 점점 미궁 속으로 헤맨다. 소나무 능선에서 임도를 거쳐 삼거리 방면으로 간다고 안내하던 바우길 사이트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 빵 하나로 허기를 때우고 좀 더 진행해보려는데 물컥 두려움이 만져진다. 지금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것.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이러다 탈진이라도 한다면...

  숫눈을 밟으며 쾌재를 불렀던 심정이 한라산이나 태백산의 상황과는 너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는 포기하는 쪽으로 기운다. 그게 현명한 방법이라는 걸 스스로 합리화하며 고라니처럼 눈밭을 가로질러 내려온다. 도로에 이르러 마음이 녹는다. 눈꽃도 스르르 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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