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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Mar 08. 2017

그리운 것이 저편에 있다

강릉바우길6 <주문진 가는 길~향호 바람의 길>

 “당신은 이다음에 어느 곳에서 살고 싶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나는 ‘산’이라고 대답하겠다. ‘이다음에’란 말은 퇴직 후를 말하는 것이니까 점잖게 말해서 노후를 보내고 싶은 희망사항쯤 되겠다.  

  그동안 걷기여행을 하면서 느낀 바지만 나는 바다보다 산을 더 좋아한다.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나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 산이다. ‘知者樂水 仁者樂山’이란 논어 구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내가 산을 좋아한다고 해서 어진 사람이란 것이 아니라 내 성향이 그렇다는 것이다. 고요하고 정적인 것들을 좋아한다. 그림, 바둑, 낚시, 여행, 영화 등등. 

  바다가 싫은 건 아니다. 바다는 바다대로 가슴을 설레게 한다. 바다를 보지 못한 날들이 길어지면 무언가 얹힌 느낌마저 든다. 요즘 같은 겨울 바다의 투명한 빛깔은 체증을 다 가시게 해서 무작정 바다로 달려가던 때도 있었다.

 

  산도 좋고 바다도 좋다는 말은 내가 자연으로 회귀하고 싶다는 열망과 동의어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노후의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아직은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있지만 그런 삶에 대한 열망이 갈수록 커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퇴직 후에 바닷가에서 한 일 년, 산자락에서 한 일 년, 주거지를 옮겨가면서 살아봐도 참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요즘이다. 누구의 인생도 아닌 내 인생이니 그렇게 산다한들 누가 나무라겠는가. 하지만 몇 년 후의 일을 누가 또 장담할 수 있겠는가.     


  세 번째 오는 사천 해변, 파도가 돌아오고 있다. 바다의 저편에서 밀려와 해변에서 부서지고 있다. 나는 이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나. 단순히 ‘파도’라고 부르고나니 너무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몸살’이라고 바꿔 불렀다. 바다의 저편에서부터 시작된 몸살, 그리운 것들이 바다 저편에 있다. 

  나는 무엇을 그리워하나. 구순의 어머니도, 독일 땅에 있는 둘째딸도, 아름답던 첫사랑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시 한 줄이 그리운 것도 아니다. 무언가 그립긴 그리운데 딱히 손에 쥘 수 없는 것이 있다. 가끔 유년시절로부터 시작되는 그 그리움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마음의 평화’ 같은 것이 아닐까. 흔들림 없이 고요한 그런 상태. 어떤 상처도 아름답게 아무는 시간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주문진을 향해 걸으면서 내가 온전히 바다에 젖는다. 제주 바다, 부산 바다, 그리고 섬들의 바다. 수없이 바다를 보아왔지만 바다는 여전히 바다라서 나를 그 앞에 연약한 존재로 세운다. 바다와 나 사이에는 경계가 있고 그 경계를 넘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망망대해에 배 한 척 띄우는 것은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바다에 대한 인간의 경외감의 표시이기도 하다.      


  바다 쪽으로 길게 뻗은 제방에 사람들이 대열을 이루고 있다. 웬 사람들이지? 처음에는 낚시꾼인줄 알았다. 얼마나 고기가 많이 잡혀서 저렇게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 실체가 금방 드러났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는 줄이었다. 이름하여 최근에 종영한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지’ 였다. 여자 주인공이 꽃다발을 들고 남자 주인공에게 프러포즈하고 있는 장면을 연출하며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여행 중에 특별한 기념이야 추억거리가 되겠지만 나는 그 사람들보다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이 더 눈에 띄었다. 원가 한 푼 안들이고 하루 일당을 거뜬히 벌어들이는 사람. ‘참 기발하다.’ 라는 생각보다 왠지 씁쓸해지는 기분이었다. 특별히 뛰어난 풍광도 아니고 기억할 만한 장소도 아니다. 하지만 단지 그곳에서 드라마를 촬영했다는 이유만으로 관광지가 된 곳이 어디 여기뿐이랴. 매스컴의 영향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모르겠다.           

  길은 영진교를 지나 다시 솔숲으로 꺾였다. 강릉에서 소나무를 볼 때마다 경이롭다. 내륙에서 보기 힘든 금강송들이 쭉쭉 뻗어있다. 솔잎이 깔린 오솔길이 푹신하고 보드랍다. 그 길에서 앞서가는 할머니를 보았다. 몸이 굽은 채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계셨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혼자서 어디 가시는 거예요?” 

  인사를 건네자 할머니께서 뒤돌아보며 반가이 미소를 지으셨다. 

  “응, 운동하고 있어.”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일흔 아홉이야. 내가 제주도에서 왔는데 교통사고가 났어. 어깨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여기저기 아픈데 가만히 있으니까 앉은뱅이가 되가는 거야. 그래서 운동하고 있어.”

  걱정이 되었지만 할 수 없이 조심하시라는 말씀만 드리고 가던 길을 가야했다.  

       

  주문진항에 이르니 사람들이 붐볐다. 관광버스와 승용차들, 쌀쌀한 날씨 속에서도 항구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미리 숙소를 예약하러 예전에 묵었던 모텔에 들렀다. 숙박료가 비싸다. 주말이나 성수기에 별도의 요금을 받는 것이 상법에 허용된 일인지 모르나 나는 이럴 때 참 괘씸한 생각이 든다. 손님들이 많으니 올려 받겠다는 것 아닌가. 아쉬운 사람이 우물 파는 세상이다. 항구 구경은 뒤로 미루고 내처 길을 갔다. 주문진 등대의 전망과 그리고 이어지는 파도의 향연들. 소돌항 아들바위 공원에 이르러 유구한 세월 파도에 깎이고 닳은 오묘한 바위들을 지나 주문진해변에서 차를 몰고 주문진항의 그 괘씸한 모텔로 들어섰다.    

 

  이튿날, 황태해장국으로 속을 풀고 향호 바람길을 이어 걸었다. 잔잔한 호수 둘레를 걸어 산속으로 접어드니 솔향이 그윽했다. 들길을 걷다가, 저수지 길을 걷다가, 다시 산속으로 접어들기를 반복했다. 길은 바뀌되 그 길의 주인인 내 몸은 청량해졌다. 

  골짜기마다 아기자기하게 예쁜 주택들이 박혀 있었다. 저녁에 저런 집들에 불이 켜지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사락사락 눈이라도 내리면 산에서 내려온 고라니가 슬금슬금 불빛을 핥아먹다 가는 곳, 어둠과 적막 속에서 오롯이 드러나는 사람의 본성을 마주하는 시간. 때로는 지극한 외로움에 가 닿을 분위기가 나는 왜 그리운 것일까. 그러나 어쩌랴. 사치스런 일이지만 나는 여전히 그런 것이 그립다. 그리운 것들이 저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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