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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Apr 13. 2017

언제나 봄날처럼

강릉바우길7<신사임당길>

   내가 두려운 것은 삶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때다. 그런 날이 언제 오게 될지 모르지만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보는 것도 모두 무의미해지면 얼마나 서글픈 일이겠는가. 볕 좋은 날 골목에서 노인들의 초점 잃은 눈동자와 마주칠 때마다 나는 다시금 삶의 의미를 떠올린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고 할 것인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누구도 명쾌하게 답을 주지 않는 진부한 명제를 다시금 들춰내곤 한다. 


  고즈넉한 시골 마을을 걷다보면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 중 하나가 빈집처럼 앉아 있는 노인들의 모습이다. 정적에 감싸인, 마치 숨은그림찾기 속에 있는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길손들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려온다. 나는 삶의 끝자락에서 느껴야할 외로움과 상실감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까.

  신사임당길. 위촌 마을 송양초등학교에서 벚꽃축제가 열리고 있는 경포까지 설렘으로 길을 시작했지만 수선화 몇 송이가 곱게 핀 허름한 집에서 겨울 빛을 머금고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 발걸음이 꼬인다. 봄날을 느끼고나 계신지…….

  그렇다. 어머니, 나는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머잖아 더 이상 자식 일도 궁금하지 않고, 옛 이야기도 꺼내지 않고, 세상일도 밀어내버리면 어떡하지? 어머니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모시지도, 잘해드리지도 못하면서 입에 발린 말처럼 어머니만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실체가 아닌 어머니라는 이미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질 때가 있다. 


  길은 숲으로 접어든다. 봄빛에 휩싸인 오솔길을 걸으며 심호흡을 한다. 몸 안의 모든 세포들이 깨어나서 오감이 열린다. 숲은 조화롭다. 나무들이며 꽃들이 다투는 것 같지만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한다. 그래서 숲에서는 사람이 겸허해진다. 주말이면 수많은 인파가 몰리는 도심 근교 유명산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호젓함과 상쾌함이라니. 이런 기분을 느끼려고 인적이 드문 둘레길을 걷는다. 길과 길을 이어서 하나의 길을 재탄생시킨 사람들 덕분에 나 같은 사람이 호강을 누린다. 


  세익스피어는 ‘마음이 유쾌하면 종일 걸을 수 있고 괴로움이 있으면 십리 길에도 지친다.’고 했다. 낯선 길을 걷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오감이 열려서 아주 작은 것에도 즐겁고 이야깃거리가 된다. 그래서 함께 걸어서 좋은 사람과 같이 하면 얼마든지 걸을 수 있다. 하물며 그 도반이 사랑하는 아내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큰개불알풀꽃 때문에 ‘풀꽃’이란 시를 들려주고, ‘불알’이란 이름이 왜 붙었을까 하는 발그레한 상상도 하면서 아기자기한 시간을 만들어주는 게 길이다.

   죽헌 저수지의 봄빛이 푸르다. 물버들과 물빛과 집이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다. 그곳에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사람들이 한가롭다. 물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봄빛을 건져 올린다. 이맘때쯤이면 붕어들이 산란을 위해서 상류 수초주변으로 몰려든다. 월척을 꿈꾸는 이들은 수초 사이에 외바늘 낚시를 드리우고 찌가 슬며시 솟아올라 수면에 드러눕는 환상을 경험한다. 그러다 운 좋게 월척을 낚아 올리면 그 푸드덕거림에 봄빛들은 얼마나 놀라겠는가. 어쩌면 봄날의 공기들은 반짝이는 비늘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런 봄날이 나에게 주어진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몇 번을 고쳐 생각해도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 이 순간이 내 삶의 어떤 지점인지 모르지만 잘 살아온 것만은 사실이다. 어려운 시절을 견뎌내고 꽃봉오리를 몇 개쯤 피워 올렸으니 이만하면 축복 받은 것이다.

  죽헌 저수지 길에서 다시 산길로 접어들어 죽림사 인근에서 마주친 목가적인 풍경이 내 발길을 붙잡는다. 목가적인 풍경은 심신이 지친 사람들에게 유용한 처방이다. 수평 구도가 그렇고 공간에 적절하게 배치된 사물과 집들, 하모니를 이룬 직선과 곡선은 호흡의 완급을 조절해준다. 총천연색으로 채색된 화면은 온몸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거기에다 사랑방이며, 마당이며, 우물이며, 살구나무며, 가축들이며, 텃밭이며, 뒷동산에서 만들어진 유년시절의 추억이라도 곁들여지면 부작용 없는 최상의 상비약이 되는 것이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 가듯이 가는 나그네’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숲길을 벗어나서 둑방길을 걷자 오죽헌에 이른다. 주말이지만 그런대로 한산하다. 그러니까 신사임당이 이곳에서 어린 율곡의 손을 잡고 내가 걸어왔던 길을 걸어 대관령에 올라서서 눈물을 자아냈다는 것이다. 나는 몇 백 년 전의 풍경을 그려낼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그녀의 손끝에서 그려지던 초충들도, 사대부나 민초들의 삶도 한낱 드라마의 한 장면만으로 기억될 뿐이다. 하물며 기원전의 세계나 중생대니 고생대니 하는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감각할 수 있겠는가. 그런 내가 시를 쓰고 있다니.    

  오죽헌을 나와서 선교장 가는 길에 올라서니 벚꽃 천지다. 지천이 환하다. 경포대로 진입하는 차량이 줄지어 서 있고, 또 많은 이들은 차를 버리고 꽃그늘을 걸어서 간다.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잔치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모든 게 때가 있다. 만개한 벚꽃을 또 어디서 볼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이 존재하고 나무들이 죽지 않는 이상 해마다 이곳은 잔치가 열릴 곳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잔치를 즐길 것이다. 언제나 봄날처럼 살고 싶을 것이다.     


  그래, 맞아. 일제히 환해지고 싶은 때가 있지. 그게 봄날이야. 묵은 찌꺼기를 버리고 환한 빛으로 몸을 씻고 싶은 거야. 꽃들이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게 와서 내가 환해지는 게 중요하거든. 그게 한 순간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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