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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Sep 13. 2015

허공에 향기를 걸어보다

지리산연가5  <대축-원부춘-가탄-화개>

  

  옅은 안개가 깔린 아침, 감나무 아래에서 할머니가 걸어 나오셨다. 두 손에 커다란 홍시 세 개를 들고 계셨다.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아는 친척이라도 되는 양 잰 걸음으로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조금 과장하자면 홍시가 신생아 머리만 한 했다. 할머니 손바닥에서 불덩이가 이글거렸다. 고삐 풀린 내 감탄사와 마주치자 홍시 하나를 선뜻 내게 주셨다. 곁에 있던 아내에게도 하나를 주셨다. 손사래를 쳤으나 마음은 염치 불구하고 홍시를 받아들였다. 공짜를 좋아하는 자본주의 습성이 덜컥 고개를 든 것이다. 할머니가 남은 하나를 내려다보시더니 그마저 비워냈다. 가벼운 손으로 안개 속으로 사라지셨다.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으로 홍시를 바라보았다. 봉긋하게 핀 홍련 세 송이, 나도 모르게 합장을 했다. 꿈결 같았다. 배낭에 넉넉한 시골 인심을 채우고 길을 찾아 나섰다.    


  둘레길 표지판이 있는 축지교에서 망설였다. 입석마을까지 가는데 오른쪽은 악양천 둑길, 왼쪽은 평사리 들길. 평사리 들길로 걸어가 부부송과 최참판댁을 보고 갔으면 좋겠는데 거리가 한참 멀다. 빠듯한 일정을 고려해 코스가 짧은 악양천 둑길을 걸었다. 안개 속에서 황금들판이 서서히 자태를 드러냈다. 산봉우리들이 죽순처럼 솟아오르고 물소리가 정겹게 귓가를 맴돌았다. 풀잎에 맺힌 영롱한 이슬이 발길에 차이고, 맑은 물속에서 노니는 버들치 눈망울들이 다 보일 듯했다. 내 허파는 환기라도 하겠다는 듯 일찌감치 이중창까지 다 열어놓았다. 하기야 어젯밤 11가 넘어서 하동에 도착했고 썰렁한 찜질방에서 잠을 잤으니 내 몸의 장기들이 나보다 먼저 그걸 느꼈을 것이다. 가을이라는 것, 가을의 축제라는 것, 가을의 여행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악양이 대봉 마을이라는 걸 몰랐는데 정말 감나무들이 많았다. 하느님이 보자면 혼탁한 세상에 핀 연꽃들이 아니겠는가.     

  공지영 작가의 ‘지리산 행복학교’에 등장한다는 형제봉 주막이 입석마을에 있었다. 도인들과 지리산 시인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다. 주인장이 들려주는 클래식 기타 소리와 소소한 평사리 달빛이 취흥을 돋우는 곳. 도시에서 탈출한 무리들이 이곳을 찾아 시와 노래와 분위기로 마음을 달래는 센티멘털 성지다. 그냥 지나치려다 언뜻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어 그곳에 한참 바라봤다. 오픈 시간은 오후 다섯 시. 낮술도 안 되고 저녁술도 안 되니 아쉬움을 뒤로 할 수밖에 없었다. 문득 퍼질러 앉아 술을 마시고, 문학을 이야기 하고, 삶의 단면들을 마주할 곳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뚝탁 주점’에서 보낸 시간들이 한때의 위안이랄까. 이제는 시인이 몸을 눕힐 옴팍한 술도가도 사라지고 죽림에 출몰하는 날도 적어진다. 인생이 멀어진다.  


  형제봉 능선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지난번 성심원에서 운리까지 가는 길에 만났던 웅석봉과 견줄 만했다. 산은 높고 길은 비탈지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고개를 넘으면 내리막길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디뎠다. 고갯마루에 서니 언제였나 싶게 개운해졌다. 몸의 노폐물들이 기다렸다는 듯 빠져나갔다. 물 좋은 계곡에 이르러 탁족을 했다. 발이 시리고 아팠다. 계곡 물속에는 회초리가 들어있다. ‘네, 이놈. 바르게 살거라.’ 종아리를 후려치는 호령이 있다. 물이 제 몸을 때려가며 강을 이루고 먼 바다에 이르는 것이다. 나는  발을 담그고 빼기를 반복하며 종갓집 어른의 호령 소리를 들었다. 회초리질이 멈추지 않았다.    

  배가 고파지자 아침에 할머니가 주신 홍시를 먹었다. 버스를 타기 전 도시락 준비하는 걸  깜빡했다. 근교가 아니고는 제대로 된 도시락을 갖출 수 없다. 김밥 정도면 호강인데 아침에 소읍에서 어떻게 그걸 구할 것인가. 이럴 때를 대비해 비상식량을 준비한다. 그게 초코바나 찰떡파이 그리고 간단한 과일 정도다. 홍시를 맑은 계곡물에 씻어 한 입 베어 물었더니 꿀물이 흘러나왔다. 오늘 아침 보살을 만났구나 하는 생각에 절로 마음이 숙연해졌다. 홍시와 집장을 좋아하시던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오랜만에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다니러 오시면 어머니는 장터에서 사온 홍시를 숟가락으로 떠서 외할머니께 드리곤 했다. 입에서 외할머니 냄새가 났다. 석양이 들이치는 대문간에서 멀거니 앉아 장죽을 빨고 계시던 외할머니의 가을. 장죽이 빨리지 않으면 띠풀 좀 해오라고 심부름을 자주 시키고 했던 그 가을은 어디로 간 것일까.     


 장죽을 물고 

 사십 년 전 족자 속에 사시는

 외할머니    

 바튼  기침해가며

 메줏가루 고춧가루 찰밥에 버무려

 무장아찌 박고 

 고춧잎 박아 

 아랫목에 잘 삭힌

 세월 한 종지

 어머니 편에 보내셨다    

 석양이 들이치는 대문간 

 멀거니 앉아서

 볼우물이 다 마르도록

 장죽을 빠시다가 

 채근하던 심부름    

 댐배 안 빨린다. 띠 풀 좀 해오니라    

          -졸시 「집장」 전문-     

  원부춘에서 중촌에 이르는 길은 모과나무가 많았다. 이십여 년 전에 산골 교장선생님이 고을마다 모과나무 묘목을 많이 심었다는데 그 결실이 지금 맺히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모과향이 그윽했다. 어느 시인은 저것을 ‘허공에 향기를 걸어보다 둥지에서 떨어진 새 새끼와 같은 슬픈  것들’이라고 했다. 그랬다.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데 산자락이나 길가에서 슬픈 것들을 툭툭 떨어뜨렸다.   

  

  임도가 끝없이 이어졌다. 오르막길에서 다리 쉼을 하던 차에 뒤따르던 한 사내를 만났다. 5일째 걷고 있다고 했다. 닷새라! 나는 5일을 닷새라고 고쳐 불러보았다. 그 말 속에서 마냥 흘러가는 구름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 무엇을 만들기 위해 걷는 것이 아니라 별다른 이유 없이 걷는 것인지, 지금쯤은 자신이 하나의 육체에 불과하게 느껴지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나는 다섯 시간째 걷고 있는데 닷새라니. 차마고도를 건너가는 사내의 딴딴한 종아리가 떠올랐다. 작정하고 길을 걷는 일은 쉽지 않다. 시간이 허락해야 하고 건강이 주어져야 가능한 일이다. 걷고자 하는 길이 삶터와 가까운 곳이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먼 곳이라면 그 조건은 필요조건이 되는 것이다. 제주 올레를 걷자고 6개월 전부터 예약을 해두었으나 정작 갈 무렵에 몸 상태가 극도로 나빠서 비행기 표를 해약한 것이 엊그제 일이었다. 말할 수 없이 서운했다. 가고 싶으나 갈 수 없는 상태, 마치 먹고 싶은 음식을 앞에 두고 먹을 수 없는 심정이랄까. 다시금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라면 아직 진행 중인 지리산 둘레길이 있다는 것. 꿩 대신 닭을 보러 온 것이다.    

  서서히 오금에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 하늘호수 민박에 이르렀다. 문간에 맨드라미가 붉게 고왔다. 구들방에 불을 지피는 연기가 산만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나무 타는 냄새가 후각을 기분 좋게 자극했다. 예약 손님이 있어서 구들방에 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사람이 그리운지 백구 한 마리가 연신 꼬리를 쳐댔다. 나무 의자에 앉아 있으니 오롯이 산에 든 느낌이다.     


  산골 살이 애환이 깊게 서린 아래채에 몸을 부렸다. 바닥은 차고 격에 맞지 않게 꽃이불이 덮인 침대가 있었다. 유화 몇 점, 목공예 몇 점, 조금은 을씨년스러운 방이었다. 몸을 씻으라고 안주인이 뜨거운 물을 양동이에 갖다 주었다. 화장실이 무령왕릉 입구처럼 기다랬다. 타일 벽은 수선스럽고 기다란 끝에 변기와 휴지통, 나무 등걸로 만든 화장지 걸이, 커다란 거울, 비누 곽, 바깥이 보이는 작은 유리창이 꼭 하나씩 있었다. 뜨거운 물을 다라이에 붓고 찬물을 섞어서 한 바가지씩 몸에 끼얹었다. 물이 흘러가는 등과 엉덩이의 온도차가 윗목과 아랫목 같았다. 늦은 오후에 김이 서렸다.    

  소박한 안주인은 이십 년째 산골 생활 중이었다. 취미 삼아 유화를 그린단다. 하늘호수란 이름도 그녀가 지었단다. 남편은 더부룩한 수염을 기른 채 장작을 패고, 구들을 지피고, 쓸 만한 나무들을 주워와 목각을 한단다. 솜씨가 제법 있어 보이는 가재도구들과 공예품이 그의 이력을 말해주었다. 살기 어떠냐고,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인 줄 알면서도 인적 없는 이곳에서의 봄과 가을과 염천과 폭설의 기억을 캐내고 싶었다. 생의 중력이 크고 무거웠다. 흔들림 없는 산골 살이 속에서 묻어나오는 인사가 겉치레가 아니었다. 찾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에 진심이 느껴졌다. 감사할 일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고 살고 있는가. 등이 시려 일곱 시부터 잠을 청하고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모과 향을 따라가다 먼발치에서 녹차 밭을 보았다. 섬진강을 보고 지리산 능선을 보았다. 길은 멀고 아득하나 눈에 선한 것은 마음에 가까워진다. 고개를 넘자 융단 같은 녹차 밭이 펼쳐졌다. 햇살이 조금씩 들고 있었다. 산속에 든 전원주택들이 마치 융프라우 오르는 길에 보았던 모습 같다. 점점 집들이 많아지고 전봇대가 많아지고 사람 사는 마을에 가까워졌다. 쌍계사 벚꽃 십리 길이 꽃들은 다 버리고 가지들만 남았다. 화개장터. 화개천의 물이 옥빛으로 빛나고 섬진강 물결이 따사롭게 일렁거렸다. 국수 한 사발, 막걸리 한 대접, 과실 한 소쿠리, 그리고 보퉁이들. 장터는 나를 눈물 나게 한다.     


  어머니는 젊은 과부시절 행상을 했다. 유목 생활을 하던 어머니가 그나마 정착하고 산 게 장터에 헛가게 한 칸을  임대받으면서부터였다. 지붕만 이고 있는 기둥에 포장을 두르고 나면 그나마 비바람을 피할 수 있었던 헛가게. 어머니는 그곳에서 장꾼들에게 국수와 막걸리를 팔면서 빚을 조금씩 갚아나갔다. 나와 여동생도 비바람을 조금씩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가장 암흑 같은 시기였다. 광주에서 다니던 중학교를 중퇴하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 일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또래 친구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갈 때 나는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헛가게에 연탄불을 피우고 부엌살림들을 들어 날랐다. 설거지를 하고, 심부름을 하고, 뒤치다꺼리를 했다. 파장이 되면 또 다시 부엌살림들을 안집으로 들어 날랐다. 또래 친구들에게 내 처지를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가끔은 여느 아이들처럼 짬을 내서 동전치기를 하고 놀았지만 여전히 저녁은 팍팍했고 아침이 오지 않을 것처럼 캄캄했다. 장이 서는 5일은 너무 짧았고 장날 하루는 너무 길었다. 장날이면 어머니가 나를 깨우는 소리가 새벽잠 속에서 두엄처럼 무겁게 내리눌렀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도 장터를 서성인다. 유난했던 내 소년 시절이 그리운 것인지, 힘들고 마음이 너무 아팠던 그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다독거리는지 모를 일이다. 화개장터에 와서 검은 봉다리를 든 아내는 즐겁고 나는 너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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