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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Sep 13. 2015

세월의 질감

 지리산연가6 <화개-가탄-송정-오미>

  장거리 트레킹을 하다 보면 내가 이어달리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바통을 건네고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에게 바통을 건넨다. 그 사이 계절이 지나가고 수많은 일상들이 지나간다.    

 

  마라톤 풀코스 완주 같은 경험도 특별할 테지만 틈틈이 끊어진 길을 잇는 경험도 색다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 흘러가버린 시간들을 다시 되돌아보며 젊어서는 알 수 없었던 세월의 질감을 느끼게 된다. 지금 내 나이는 풀이 죽어서 얇아진 옷감 같은 것. 네 귀에서 잡아당기면 비명 소리를 내며 찢어질 것이다. 이런 세월의 질감은 소파나 회전의자에 앉아서는 결코 느낄 수 없다. 낙엽이 깔린 오솔길을 걷거나 노을이 걸린 먼 산을 바라볼 때 혹은 찬바람에 옷깃을 세우는 순간 마음 자락을 스치고 가는 것이다. 길을 걷는 내내 몸은 고달프고 힘들지만 몸뚱이에 흐르는 정직한 땀방울을 닦으며 내가 살아있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 또한 내 육체에 대한 질감이니 겉과 속이 다를 리 없다.     

  얼마 전 아내는 정기검진 결과를 받아 들고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생체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무려 세 살이나 더 높게 나왔기 때문이다. 평소 건강관리를 잘 한다고 기름진 음식을 피하고 스트레칭은 물론 다람쥐처럼 뒷산을 오르내리며 유산소 운동을 했는데 결과가 탐탁지 않게 나온 것이다. 아마도 몇 살이 더 젊게 나왔으면 “여보, 이것 봐. 내가 사십 대 후반이래. 백 살까지 살 수 있겠지?” 내 얼굴을 마주 보며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본전도 아니요 노력에 대한 대가가 엉뚱했으니 막대한 손해를 본 심정이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젊게 보인다고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젊음이 다시 되돌아와 연애라도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고, 하고 싶었던 일을 무작정 저질러서 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흘러가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이 다가오는 시간을 회피할 수도 없다. 우리 몸은 점점 풀이 죽어 얇아지는 옷감 같으니 말이다. 어디가 찢어지지 않으면 다행이지 마음대로 재단해서 만들고 싶은 옷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몸으로 새벽 첫차를 탔다. 의정부에서 창동역까지 택시로 달려 1호선 첫차를 타고 또 남부터미널에서 하동행 첫차를 탔다. 대체 무엇을 얻자고 이렇게 새벽부터 호들갑을 떨고 있는가 자문을 했으나 답이 없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도 대개는 그렇단다. 한 달 여를 걸으며 무엇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견디며 걷고 있는지 자신도 모른단다. 순례자도 아닌데 뚜렷한 동기도 없이 왜 걷고 또 걷는 건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단다. 다만 마지막 목적지인 산티아고 성 야고보 성당에 도달했을 때 어렴풋이 해답을 얻는다고 한다. 그러니 내가 호들갑을 떠는 진정한 이유를 내가 알 수 있겠는가. 주말인데 눈꺼풀이 저절로 열릴 때까지 이불 속에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대충 눈곱을 떼고 차나 한 잔 마시며 음악을 듣거나 책이라도 읽으면 오죽 좋겠는가. 영화나 한 편 때리고 저녁에는 삼겹살에 소주 한 잔하면 그만한 행복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런 데 결국 그 유혹을 떨치고 길을 또 나선 것이다.     

  다시 화개. 장터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송정으로 향했다. 쌍계사 벚나무 길을 벗어나 화개초등학교를 지나자마자 가파른 산길에 접어들었다. 2주 전보다 단풍이 더 들었지만 여전히 절정은 아니다. 숲에 들자 낙엽들이 지고 있었다. 뱅그르르 허공을 돌아서 툭 떨어졌다. 한 잎이 지고 두 잎이 지고 동시에 여러 잎이 지기도 했다. 저 허공의 길은 얼마나 많은 나선을 숨기고 있는 것인가. 만해도 이런 길을 걸었을 것이다. 단풍이 지는 길을 걸으며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떠올려 ‘아아, 나의 님은  갔습니다.’라고 노래를 했을 것이다. ‘우리는 만날 때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고 절절한 마음을 실어 보냈을 것이다. 나는 마치 만해가 걸었던 길인 양 낙엽을 조심스레 밟으며 갔다. 녹슨 머리핀 같은 소나무 낙엽들은 발자국을 푹신하게 감싸준다. 떡갈나무 낙엽들은 거들먹거리는 사람처럼 요란스럽다. 서어나무 낙엽들은 조신한 아이들 같다. 나무들이 사는 세상이 아름다운 숲으로 보이나 들여다보면 거기에도 적자생존이 있고 세 들어 사는 무수한 생물들이 죽고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사람 사는 세상과 다를 바 없다.      

 

  날씨가 흐리더니 비가 내렸다. 작달비는 아니나 굵어질 기미가 보였다. 우비 준비를 안 했으니 난감했다. 그러나 그건 나의 걱정일 뿐 나뭇잎들은 립 그로스를 바른 것처럼 반질거렸다. 유달리 빨간 옻나무 잎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립스틱 광고에 나오는 여자의 입술처럼 매혹적이었다. 귀를 여니 빗방울들이 나뭇잎에 떨어지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려왔다. 나무들은 단추를 하나씩 풀며 속살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빗방울은 오로지 나에게만 이질감으로 다가왔다. 비가 조금씩 더 굵어졌다. 손바닥을 펼쳤다.  

  

  대여섯 살 때 일이다. 우리 집은 초가지붕을 얹은 조가비 같은 오두막집이었다. 뒤란에는 텃밭이 있고 대나무들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었다. 정지를 가운데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안방 앞에는 마루 대신 대나무 평상이 있었다. 촘촘하게 엮긴 했으나 가끔 동전이 빠지고 양말이 끼곤 했다. 평상 아래 신발 두 켤레 올릴만한 댓돌이 있었는데 댓돌에서 팔을 뻗치면 낙숫물이 내 손바닥에 닿았다. 비가 오면 나는 그곳에서 손바닥을 펴고 낙숫물을 받으며 혼자 놀곤 했다. 작은 손바닥에 떨어지는 낙숫물은 간질이는 것 같기도 하고 때리는 것 같기도 해서 재미있었다.  잘못받은 낙숫물은 튀기도 해서 팔뚝까지 기어올랐다. 초가지붕에서 떨어진 낙숫물은 마치 조선장을 풀어놓은 색깔이었는데, 그것들이 골을 타고 헛간채로 흘러 아랫집 도랑으로 빠져나가곤 했다. 나는 낙숫물 받기 놀이가 싫증 나면 닭털이나 종이를 낙숫물 위에 놓아두기도 했는데 종종 도랑까지 가지 못하고 젖어서 제자리에 가라앉아 있곤 했다. 마당에는 크고 작은 웅덩이가 생겨서 빗방울 꽃들이 피어나곤 했다. 몇 마리 토종닭들은 빗속에서도 개의치 않고 먹이를 찾아 두엄자리를 헤집곤 했다. 사립문 밖에서는 도랑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그런 어느 날 머리에 떨어진 낙숫물을 털며 객지살이를 하던 형이 과자봉지를 들고 들어서기도 했을 것이다.    

 

  날이 더 흐려지고 숲도 더 어두워졌다. 가탄에서 송정 구간은 거의 숲길이었다. 오늘 예정한 구간을 어둠 속에서 걸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니 걸음이 빨라졌다. 몇 시간 내내 딱 한 사람 만났으니 만약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었다. 되돌아갈 수도 없고 내처 달려갈 수도 없었다. 다행히 이정표를 보니 머지않은 곳에 민박집이 있었다. 황토방이었다. 거리와 걷는 시간을 계산해서 묵어야 할 곳을 예약하긴 했는데 황토방이라니 내심 만족스러웠다. 게르 같은 둥근 황토방이 세 개 있었다. 할머니가 구들을 지펴 놓으셨다니 따뜻할 터였다.  지난번 하늘호수 민박집의 구들방에서 못 잔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황토 벽돌이 둥글게 감싼 방이 아늑했다. 문들이 아귀가 맞지 않아 잠기지 않았지만 화장실이 딸려 있고 티브이가 없어서 좋았다. 


  반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고 나오니 어둠 천지다. 흐린 하늘 탓에 별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마당 입구에 가로등 하나 그리고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펜션 하나 또 그보다 더 떨어진 곳에 집들이 있었다. 산과 산 사이에 적막한 집이 있고 나는 그 적막함 속에 아내와 단 둘이 들어 있었다. 함께 민박에 들었던 젊은 부부는 벌써 자는지 불이 꺼졌다. 우리 보다 늦게 원부춘에서 출발했다는데 저녁 전에 도착했으니 부지런히 걸은 셈이다. 아마도 걷는 일에 열중했을 것이고 우리 보다 더 피곤했을 것이다. 산중에서 티브이도 없는데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잠이나 자는 거지. 찜질방이었다. 굳었던 근육들이 인상을 쫙 폈다. 비가 억수로 내려도 무슨 걱정이랴. 나는 지금 남국의 강렬한 해변에 와 있는 거다. 열반에 들자.    


 산과 산 사이 

 새물내 나는 적막에 들어 

 둥근 황토방에 등을 대고 눕는다     

 평생 사람을 받드는 일은 

 허술한 몸속에 

 따뜻한 구들을 들이는 것이 아닐까 

 당신을 생각하고 

 본래 자리인양 

 내 곁에 나란히 누운 당신을 

 돌이켜 생각하고     

 우리가 늙어가는 동안 

 따뜻한 일이 얼마나 더 있을까 

 가슴에 손을 넣어보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비 내리는 가을 숲을 걸어왔으나 

 당신에게도 내게도

 더는 만져지는 것이 없다     

 어둠은 깊고 

 벌써 이렇게 흘러가버린 시간들이

 괜스레 미안해지는데 

 눈곱도 떼지 않은 내일이 

 나를 깨울 것처럼

 봉분에 들어 

 따뜻한 잠을 청하는 저녁    

     -졸시 「황토방 민박」 전문-    


  아침은 젊은 부부와 겸상을 하고 함께 길을 떠났다. 도반이 있으니 덜 외로울 것 같지만 우리는 각자 걸었다. 호젓하게 걷자고 왔으니 그렇게 가야 했다. 말을 섞자고 했으면  어제저녁 술 한 잔 권했으면 됐을 것이다. 그러나 길을 걷는 것은 내 안에 침잠하는 일이다. 이리저리 쏠리면 후회스러울 터, 나는 뒤처져 걷기 시작했다.

    

  송정에서 오미까지. 시야가 트이는 곳이면 으레 섬진강이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니까 화개에서부터 줄곧 섬진강이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멀리 구례 읍내 모습이 보이고 기름진 구만들 일부가 보였다. 아직 가을걷이가 끝나지 않은 곳들도 있었다. 일손을 놓친 것인가. 농부의 심정이 어떨까 생각해보니 무수하게 떨어져 있던 알밤들이 떠올랐다. 게 중에는 성한 것들도 있고 벌레 먹은 것들도 있었는데 전혀 손길이 가지 않은 채로 길가에 구르고 있었다. 알고 보니 황토방 민박집 주인의 밭이었다. 서울에도 살림이 있는데 어쩌다 적기를 놓치고 일주일 있다 와보니 다 떨어져 썩더란다. 주울 인부도 없고 해서 태반은 버렸다는 것이다. 열매들이 떨어져 썩는 것이 꼭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그때야 알았다. 알밤들도 그렇고 홍시들도 그렇고 모과들도 그렇다. 과일들은 사람의 입에서 가장 향기로운 것이다.    

  오미마을 운조루에 이르렀다. 운조루란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라고 하는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금가락지가 떨어진 ‘금환락지’의 명당자리란다. 솟을 대문 안으로 들어가려니 벼이삭을 훑고 있던 할머니가 입장료를 내란다. 매표소도 없이 그냥 그렇게 받는 모양이었다. 조선시대 전형적인 양반 가옥이었다.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행랑채, 조금 특별한 점이 있다면 사랑채에 부엌이 있어 안채까지 연결되었다는 것. 그러나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사랑채 부엌에 있는 원기둥 모양의 큰 뒤주였다. ‘他人能解’라고 씌어있었다. ‘누구든 문을 열어 쌀을 가져가도 된다.’ 요즘 같으면 동사무소에 있는 사랑의  쌀독쯤 되겠다. 김장훈이나 가수 션 같은 마음쯤 되겠다. 나는 이타적인 삶을 볼 때마다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그런 부끄러움을 안고 운조루 마루에 한참 동안 앉아 따스한 가을 햇살을 쬐었다. 바람은 불었으나 시간은 멎어 있었다.     


  시간의 더께가 느껴지는 마루를 쓸자 금빛 가루들이 묻어나왔다. 비와 눈과 먼지를 쓸고 닦았을 행랑어멈들의 가엾은 손길이 느껴졌다. 그게 몇 백 년이다. 인생은 별 거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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