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은 처음부터 없었어

빨간 벽_ 브리타 테켄트럽 |김서정 옮김

by 지초지현

[내향점]


분명히 일을 딱 부러지게 잘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그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게 이렇게 힘이 드는지 모르겠다.

몸이 힘든 것보다 마음이 디다. 물을 가득 흡수한 스펀지처럼 축축 쳐져서 그 물기가 일상을 짓르게 한다.

말도 안 되는 띠궁합까지 생각해본다. 나는 개띠랑 상극이라고 하던데 그 사람이 개띠라서 그런 건가?

한동안은 나의 정신세계까지 파헤쳐가며 고민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슬기로운 초등생활의 이은경 선생님 강의를 듣는데, 안 되는 이유부터 찾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조언도 할 필요가 없어지더라고 한 말에 무릎을 탁!

이 사람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안 되는 이유부터 나열해서 내가 힘들었던 거구나.

처음에는 제시하는 방법에 대한 확인 절차 같은 것이라고 여겼는데, 알고 보니 매사 부정적인 시선이었음을,

그 시선으로 기껏 열어보인 가능성을 탁탁 닫아버렸구나. 그렇게 닫혀버려 꽉 막힌 문 앞에서 늘 서성거리느라 내 마음이 그리 고되었구나. 이유를 알고 나니 답답했던 벽 하나가 없어진 느낌이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벽을 만나고, 혹은 스스로 보호막 같은 벽을 만들기도 한다.


중1 여학생 중 한 명이 같은 반 친구의 행동이 자꾸 거슬려서 수업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친구가 안 좋은 시선을 보내거나 힘들게 하는 행동을 했는지 물어보니 그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그 학생에게 조용히 이 그림책을 건네었다.

호르몬의 장난으로 온갖 벽이 만들어졌다가 없어지고 있을 중학생에게 빨간 부적처럼.




<빨간 벽>이라는 그림책의 주인공은 호기심 많은 꼬마 생쥐이다.

눈 닿는데 까지 뻗어있는 빨간 벽이 궁금해진 생쥐는 벽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다.

함께 있는 이들에게 그 궁금증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한다.

겁 많은 고양이는 "바깥은 위험해, 벽이 우릴 지켜줘"라고 말한다.

늙은 곰 할아버지에게 그 벽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궁금하지 않은 삶의 일부이고

행복한 여우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행복하다고 한다.

소리를 잃은 사자는 허공을 향한 멍한 눈으로 벽 뒤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래도 벽 뒤의 세상이 너무 궁금한 생쥐는 벽 넘어서 날아온 파랑새를 만나게 된다.

파랑새와 함께 벽 너머 세상으로 건너간 생쥐는 색색가지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된다.




인생에 수많은 벽이 있고 그 벽은 스스로 만든 것이라고 여기서 말하고 있다.

마음과 생각을 열고 두려움보다는 궁금함으로, 스스로 진실을 찾아 나서는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한다.

그리하면 아름다운 세상을 맞이할 수도 있다고.


우리는 세상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파랑새는 무엇일까?

무엇인가를 스스로 찾아 움직이는 사람은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대면하고, 오색찬란한 색상으로 만들어진 많은 경험들이 그의 삶에 여러 겹으로 입혀질 것이다. 두꺼운 단벌의 옷보다 여러 겹으로 껴입은 옷이 추운 겨울에 체온을 유지하기 더 좋은 것처럼 여러 겹의 경험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바깥세상의 온도를 견뎌내기에 더 효율적일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본인의 태생지를 벗어나 다른 곳을 가보는 것으로,

또 어떤 이에게는 책 속의 향유를 통해, 다른 이는 무엇이든 직접 해보는 것으로 여러 겹의 경험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벽은 처음부터 없었어" 파랑새의 이 한마디가 마음에 스며든다.


어쩌면 스스로가 만든 벽에 갇혀 보이지 않는다고, 힘들다고 주저앉아있는지도 모르겠다.

설령 너무 힘겨워 벽처럼 느껴지면 오히려 그 벽에 잠시 기대어 쉬다가 돌아가든, 뛰어넘어가든, 아님 투명망토를 씌워버리든 그 자리에 머물러있지 않고 계속 나아가야겠다.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벽 없는 세상을 위해

B.T




[외향점]


다른 장르보다 그림책은 주변 텍스트에서 제공하는 정보가 더욱 풍부하고 암시적이다.
그림책의 주변 텍스트는 앞표지, 앞면지, 속표지, 뒷면지, 뒤표지 등 여러 단계로 본문을 감싸고 있다.

앞면지와 뒷면지가 서로 다른 경우도 있다. 이들은 대부분 서사의 처음과 끝에서 생긴 변화를 나타내 준다.
<깊고 그윽하게 우리 그림책 읽기 _남지현 그림책 평론집 중에서>


<빨간 벽> 책의 앞표지와 뒤표지는 빨간 벽을 연상할 수 있도록 연결되어 있다. 앞표지를 펼쳐 만나게 되는 면지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음영만 존재하는 파란 세상의 숲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마지막 장을 다 읽고 난 다음 표지를 닫기 전에 만나는 뒷면지는 오색찬란한 숲으로 변해있다.

의식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표현하면서 주인공들과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림책의 또 하나의 매력인 주변 텍스트의 활용이 돋보이는 책이다.

본문의 이야기는 판화기법으로 그려진 동물들과 배경이 콜라주처럼 되어 있어 다양한 미술 기법을 간접 경험하게 한다.











사진 출처 : 봄봄출판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