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괜찮은 당신께
"이젠 집에서 빈둥대는 내가 한심해."
친구의 말은 꽤나 충격이었다.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자존감이 강한 그녀였기에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적이 없었다. 스스로를 잘 토닥일 줄 아는 친구였고, 어떤 어려움도 그 만의 방법으로 곧잘 이겨낼 거라 생각했다. 긴 대학생활을 마치고 그는 취업준비생이라는 어중간한 신분을 얻게 됐다. 공연기획자로서의 꿈을 가지고 취업사이트를 샅샅이 뒤졌지만, 수 만개의 일자리 중 그녀에 눈에 들어 온 곳은 서너 개. 그마저도 '차량소지자 우대'라는 문구에 걸려 기껏 쓴 이력서를 넣을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뿐이었다.
이주가 지났지만 아직 연락은 오지 않았다. 통장에 잔고는 떨어져가고, 집에 있는 시간은 늘었다. 그녀의 시간은 끝을 모르는 쳇바퀴처럼 돌아갔다. 이미 취업을 한 친구들은 지금 순간을 즐기라며 위로를 포장한 푸념을 늘어놓았다. 친구는 그런가, 라며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을 했다.
"불안한 마음을 들키는 게 무서워."
결국 뱉은 그녀의 말에 난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힘들다는 말 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에겐 위로도 짐이 될 뿐이었다.
더 이상 내가 필요하지 않은 걸까?
이렇게 쓸모없는 사람이었나?
난 뭘 할 수 있지?
누군가의 대답을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초조하다. 가끔은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타인의 평가에 괴로워하며 스스로를 쓸모없다 여기기도한다. 취업이든, 연애든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언제부턴가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남의 시선에 의해 나의 가치를 평가받게 됐다. 가혹한 혈실 속에서 우린 스스로 채찍질을 하며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나도 꽤나 큰 슬럼프롤 겪었었다. 특별한 원인도 없었다. 아니,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냥 모든 기회가 나를 피해 가는 것만 같았고, 어떤 일을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날 힘조차 없어 뜬 눈으로 하루를 보내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침대와의 물아일체를 경험하고 스스로가 한심해질 때쯤, 엄마한테서 연락이 왔다.
"오늘 집 정리를 했는데, 너 물건이 많이 나오더라. 좀 가져가. 둘 데가 없어."
힘들게 일으켜진 몸뚱이엔 이불자국이 그대로 나 있었다. 머리를 질끈 묶고 간 본가에는 학교 다닐 때 보던 문제집과 철 지난 옷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쓰던 두꺼운 일기장도 있었다. 나는 우연히 눈에 들어온 일기장을 집었다. 책상도 없어 식탁에 앉아 페이지를 넘겼다.
아마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고치지도 못한다는 중2병에 걸려서 인지 차마 밝히기 힘든 문장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불자국이 난 손등이 멈춘 곳은 일기장 중간쯤에 다다랐을 때다.
내 모습은
나를 보는 사람들의 수 만큼 존재한다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인용한 듯했다. 검은 볼펜으로 써 넣은 글귀에는 빨간 색연필로 밑줄까지 쳐 있었다. 왠지 모를 창피함과 함께 중학교 2학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가치는 남에 의해 평가될 것이 아니야.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어. 질문에 대한 답은 나만 내릴 수 있는 게 아닐까?
10년이 지난 뒤에도 나는 차마 밝히기 어려운 (하지만 이미 밝혀버린) 오글거리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지만, 그 당시 만큼은 부끄럽지 않았다. 지금 다시 쓰려고 하니 일본 드라마의 교훈적인 장면인 것 같아 다시금 얼굴이 뜨겁다. 그럼에도 굳이 글로 남기는 이유는,
주변의 시선과 압박에 지친 당신이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아주 조금이라도 당신을 더욱 토닥여 주기를, 나는 바라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스스로에 대해 자신 없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맞다. 혼자서 아무리 토닥인다고 해도 일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서 좌절해버리는 나약한 멘탈이 되진 않을 것이라고. 자신을 더욱더 수렁으로 빠트리는 악순환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변의 바람대로 자신이 휘둘리도록 두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지만, 아직 취업도 하지 못한 백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지만, 인기가 없지만, 매일 상사에게 갈굼을 당해도. 그래도 괜찮다. 당신이 싫은 어떤 이유라도 괜찮다. 당신이 알고 있기 때문에. 가장 무서운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오만한 것이기에.
지금 이런 나라도, 괜찮다. 내가 괜찮으니 당신도 괜찮다.
오늘 밤 잠자다 발차기를 할지도 모르겠다. 역시 새벽에 쓰는 글은 위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