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자의 입학식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다
-어린 왕자
일시: 지난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2박 3일
장소: 전라북도 장수
비용: 직장인이 가볍게 등록하기에 살포시 무거운 수준
한 달 전 이 소식을 접하고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입학을 결심했다.
진짜 학교가 필요한 대상은 정작 어른이 아닐까?
이것은 분명 나의 인생이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나에 대해
또 내 삶에 대해
그런데 만약
누군가 내가 찾는 답을 알고 있다면
정해진 답이란 게 이 세상에 있다면
내겐 아직 그 답의 실마리가 없는데
스스로 찾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데
가이드라도 해 줄 수 있는 단서가 있다면
문제들을 풀 수 있는 공식의 힌트라도 알려줄 누군가가 있다면
만나고 싶었다.
모르는 걸 알려주는 선생님 같은 존재가 어른이 된 내겐 절실했다.
막상 어른이 되고 보니 학교에 다닐 때보다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와보니 풀어야 할 숙제가 더 많아졌다.
두렵고 막막했고 앞이 안 보여 까만 밤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알고 싶은 것들은 또 의례 알아야 하는 것들은 어른이 된 후 더 많아졌다.
하지만 나는 이미 학교를 졸업한지 오래다.
정해져 있는 과목도, 선생님도, 교실도, 수업도 이젠 내게 없는 상태이다.
학생은 돈 내고 학교에 다니지만
회사원은 돈 받고 회사에 다닌다
(그러니까 요령 피우지 말고 더 일해!)
(그러니까 아마추어처럼 굴지 말고 프로면 프로답게 일해!)
나이가 들수록 풀어야 할 숙제들이 늘어났다.
세월이 갈수록 이상하게 처음 접해보는 문제들은 많아졌다.
일에서도
또 내 개인의 삶에서도.
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하는 중이었다.
남의 돈을 받아
내 주머니에 넣는 일
그러기 위해서는 일과 회사만 봐야 한다.
이 곳은 전쟁터다. 자칫 방심해 긴장을 늦추는 순간 경쟁에서 뒤처지고 총을 맞을 수도 있는 전쟁터.
그래서일까? 분명 내가 없어도 회사는 끄덕 없이 돌아갈 테지만
마치 내가 없으면 일이 안 돌아갈처럼 과업들은 쏟아졌고
딱 그만큼 개인적인 숙제들도 산처럼 쌓여갔다.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빌려올 만한
다른 이의 생각이
삶에 직면한 숙제들을 푸는데
힌트가 될만한 공식이
무엇보다 어떤 이해관계없이
함께 배우고 웃고 뛰어놀 수 있는 친구가 필요했다.
이미 서른이 훌쩍 넘은 내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학교였다
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빌려서라도 훔쳐서라도 그것을 갖고 싶었다.
어른에게 필요한 것은 ‘학교’였다.
아마 어른들을 위한 학교가 있다면 그것의 이름은 인생학교쯤 되지 않을까?
학창 시절 도시락과 급식은 나름 괜찮았었다.
10대 때는 참 배고팠었으니깐.
그러 보고니 음식에 대한 불만은 어른이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밥 먹는 시간이 유일한 탈출구 같은
치열한 현장 속 애씀 때문일까?
그 기대만큼이나 음식은 그저 그럴 때가 많았다.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음식은 언제나 기분 나쁘게 배가 불렀고 그 느낌이 너무 싫었다.
학생으로 돌아온 라이프 스쿨 첫 식사는 무엇이었을까?
자연을 가득 품은 밥상, 장수 밥상
재료 하나하나 건강을 머금고 있었고 나는 배가 불러오는 것에 화가 났다. 기분 나쁜 배부름이 아닌 더 먹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포만감을 동반한 짜증.
사장님이 지어주신 찰밥은 이런 것이야말로 마약이겠구나 싶었다. 사람들은 식사를 다 마친 후에도 자꾸만 딱 한 숟가락만 더를 외치며 차마 수저를 놓지 못했다.
어른들을 위한 학교는 바로 교실로 들어가지 않았다. 전라북도 장수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풍경을 감상하고 드론을 띄워 우리를 기록하고 사과를 따러 갔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따 보는 사과였다. 이 나이 먹도록 그렇게 많은 사과를 먹어왔으나 직접 그 사과를 나무에서 따 본 것은 처음이었다. 사과의 맛이란 이런 거구나.
서른 넘게 나는
진짜 사과 맛을 모르고 살았구나
흠뻑 땀에 젓은 9월 말 가을날,
이게 뭘까,
이 학교는 무엇이길래 교실로 안 들어가고 난데없이 사과를 픽킹 할까?
가방 깊은 곳에 사과를 하나 담아 넣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이제 진짜 학교로 간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1999년에 폐교한 장수의 연평 초등학교. 박일문 사진작가는 2003년 이 곳을 인수해 하늘내 뜰꽃마을이라고 이름 짓는다. 기억 저 편 아련하게 남아있는 세종대왕 동상, 이순신 장군 동상, (항상 학교마다 동상들에는 무서운 이야기가 있었는데 어른이 되어 본 동상은 하나도 무섭지 않더라. 이것이 동심을 잃은 걸까?) 타이어로 만든 그네 큰 나무 탁 트인 운동장 하늘과 맞닿아 있는 건물들.
자연을 품은 이 곳이 우리의 교실이었고 간이 의자를 책걸상 삼아 삼삼오오 모여 앉았다.
빽빽한 글씨와 칠판 대신 동심을 불러일으킬듯한 노란색 배경의 커다란 통 천. 추억의 딱지, 쏙 쏙 빼먹는 맛이 일품인 아폴로, 씹는 맛 제대로 쫄쫄이, 꾀돌이 과자, 언제 적 놀잇감 종이 인형들이 담긴 책가방을 받으니 아 내가 진짜 학교에 왔구나를 실감할 수 있었다. 뛰어놀고 싶고, 땀 흘리 고프고, 마음을 모으고 싶었다. 그래서 눈 앞에 보면서도 실감할 수 없는 탁 트인 잔디밭에서 축구를 하고, 잡기 놀이를 하고,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만난 사람들과 마음을 모아 이야기했다.
저녁이 되고 장수 흑돼지를 사람들과 구워 먹으며 인생 사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실로 오랜만에 술 없이(아마도 처음) 구운 고기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알코올 없이 야외의 구운 고기 먹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맨 정신에 이야기를 나누어도
장수 밤하늘의 차갑고 싱그러운 공기가,
그을린 나무 냄새가,
흑돼지의 지글거리는 기름 향이
사람들을 흠뻑 취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밤은 깊어갔고 우리의 이야기도 그러했다.
장수에서의 첫날밤이 가고 있었다.
그렇게 사람 냄새 속에서 구운 고기 향 속에서 우리의 이야기도 짙게 깊어갔다.
어른들은 언제부터인가 처음 만나면 서로 명함을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를 내가 아닌 큰 회사로, 어떤 조직의 이름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당신은 이쯤 하는 사람이군요, 너는 이 정도 레벨 사람이구나. 우리는 어쩌면 명함을 보며 그 사람을 보기 전에 그가 가진 지위를 보고 판단을 먼저 했는지 모르겠다.
어른들의 인생학교에 우리는 그 사람을 그가 가진 지위로 직업으로 직함으로 회사로 명함으로 보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으로 만났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리는 모두 그 사람이 현재 가진 위치와 상관없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직장인으로서 가볍기 등록하기에 꽤 무거운 수준의 등록비. 하지만 생각해 보면 명품 가방의 1/5 수준도 안 되는 돈이다. 명품 가방은 사면서, 비싼 술은 마시면서, 유명 브랜드의 옷은 사면서 왜 배우는 것에는 항상 인색해질까?
여기에 온 사람들이 대단했던 이유는 기꺼이 그 비용을 물건이 아닌 인생학교에 낼 수 있다는 점이다.
그 결정이 대단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2박 3일의 시간을 개인의 자유의지로 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금토일 단 3일의 시간이었지만 생각보다 2박 3일의 시간을 온전히 뺄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분명 내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인생을 구성하고 있는 내 시간의
온전한 주인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분명 그 시간은 나의 것이지만
가끔은 내가 시간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오히려 내가 지배되어 버린 느낌.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시간'을 스스로 컨트롤하는 진짜 내 삶의 주인들, 이들과 함께하는 이 곳 인생학교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장수의 깊은 밤과 함께 나도 깊게 잠들까 한다.
그래야 또다시 주어지는 내일을 겉만 핥지 않고 깊게 보낼 수 있을 테니.
어른들을 위한 인생학교 [2016 더 라이프 스쿨] 2일 차 이야기로 곧 또 찾아갈 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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