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탈' 시리즈와 '별' - 성장의 기록

by Glandarius

* 게임 ‘포탈’과 ‘포탈 2’의 스토리에 대한 치명적인 스포일러와, 소설 ‘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글라도스

밸브 코퍼레이션의 FPS 게임 ‘포탈’의 스토리라인은 그 획기적인 퍼즐에 비해 무척이나 단순한 편이다. 인간인 주인공 ‘첼’은 ‘애퍼처 사이언스’ 사의 피실험자가 되어,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을 죽이려 하는 인공지능 시스템 ‘글라도스’가 설계한 위험한 테스트들을 전부 통과하고, 마침내 실험실 밖으로 빠져나가 글라도스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입혀 파괴하는 것으로 게임을 마무리 짓는다.

반면, 후속작인 ‘포탈 2’는 발전한 그래픽 및 퍼즐들과 함께 구체적인 스토리라인을 제공한다. 싱글 플레이가 진행되면서 부활한 글라도스와 첼은 처음엔 대립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게 되고, 글라도스가 원래 인간의 인격이 삽입된 인공지능 시스템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리고 이야기의 극후반부, 글라도스는 드디어 첼을 죽일 수 있는 완벽한 기회를 얻지만 그 기회를 거절하고선 첼에게 자유를 준다.

여기까지만 보면, 글라도스가 미친 살인기계에서 그나마 인간적인 인공지능으로 성장한 것이라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첼이 풀려난 이후 애퍼처 사이언스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루는 협동 모드의 엔딩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협동 모드 시점에서의 글라도스는 언뜻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 완전히 흥미를 잃고 한 쌍의 로봇을 피실험체로 사용하는 실험을 시작하기로 한 것처럼 보이나, 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플레이 내내 암시된다. 글라도스가 로봇들을 실험에 투입한 건 오로지 그들을 ‘인간과 비슷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고, 최종 목적은 피실험체로 쓸 수 있는 수많은 인간들이 냉동 상태로 보관된 창고를 여는 것이다. 협동 모드의 공식 스토리에 따르면, 이 인간들은 전부 글라도스의 실험에 투입되고 결국 창고의 문이 열린 지 1주일이 지나기 전에 전부 죽는다고 한다. 싱글 플레이 막바지, 첼을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정성스럽게 배웅해 주던 모습과는 정반대라고까지 할 수 있는 행동이다.

그렇다면, 과연 글라도스는 첼과 함께하며 정말로 성장한 걸까? 만일 그렇다면, 그는 대체 왜 여전히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는 것일까? 반대로 글라도스가 첼과 함께하는 여정 내내 전혀 성장하지 않았던 것이라면, 그는 왜 굳이 첼을 죽이지 않고 살려 줬을까?


2. 별

‘포탈’과 마찬가지로 황순원의 단편 소설 ‘별’의 줄거리도 그리 복잡하지는 않다. 돌아가신 친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어머니의 얼굴이 분명 아름다웠을 거라 상상하는 주인공 소년은, 여러모로 어머니를 떠오르게 하지만 못난 얼굴인 자신의 손윗누이를 미워하며 심술을 부린다. 이유는 단순하다. 소년에게 있어 누이가 어머니와 닮았다는 걸 인정하는 것은, 어머니의 얼굴이 아름답지 않았단 걸 받아들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누이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항상 못되게 굴고 이별하는 날에도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았던 소년은, 결국 누이의 부고를 전해들은 후에야 자신이 누이를 그리워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닫는다. 누이에 대해 생각하던 소년은 어느새 어머니뿐만이 아니라 어머니와 누이 모두를 ‘별’로 여기고 있었던 자신의 심리를 자각하지만 애써 부정한다.

소년의 성장 과정은 언뜻 글라도스와 비슷해 보인다. 둘 모두 특정 대상, 누이와 첼을 미워하고 괴롭히지만 결국 이야기의 막바지에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이 둘이 그러한 행동을 하게끔 만드는 동기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고, 그 차이가 둘을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로 만든다.


3. 성장기

소년과 글라도스 모두 무엇인가에 매혹되어 있다는 것까지는 비슷하다. 소년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탓에 어머니와 관련된 요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름다움에 큰 관심을 보이고 찾아 헤맨다. 글라도스는 자신이 과학에 매료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결국 로봇과 인간 중 인간을 피실험체로 선택하는 모습을 보면 그를 실제로 매혹시키는 것은 인간, 혹은 인간적인 요소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소년은 누이에게서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었기에 누이를 미워했다. 소년이 보기에 누이는 어머니와 언뜻 닮은 것 같지만 아름다움은 없는, 소년을 매혹시키기에는 부족한 존재처럼 보였기 때문에 미워했던 것이다. 반면 글라도스가 첼을 미워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그가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적인 요소에 매혹당하면서도 그 결정체인 인간은 혐오하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부터 둘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소년이 누이를 인정한 건, 그 자신이 그리워하는 아름다움이란 외형이 아닌 내적 요소에 있다는 것을, 누이가 그에게 주었던 한결같은 사랑이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끊임없이 끌어당기던 그 요소가 결국 누이에게도 있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반대로 글라도스는 첼에게서 평범한 인간들이 가진 특성들을 찾지 못했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비정상적으로 끈질기기 그지없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위험한 괴물 같은 인간. 그게 글라도스의 눈에 비친 첼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글라도스는 첼에게 자유를 주기로 결정하는 동시에 그를 인정한다.

소년은 분명 성장했다. 아름다움은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란 사실을 인지했고, 아직 누이가 어머니만큼이나 ‘아름다움’을 의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으려 하나 무의식적으로는 이미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반면, 글라도스는 싱글 플레이 막바지까지 근본적으로는 거의 성장하지 않았거나 성장을 거부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첼을 살려준 건 인간을 인정한 게 아니라, 다른 인간과는 다른 첼 개인을 인정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을 여전히 경멸하고 혐오하는 글라도스가 냉동 상태로 보관되어 있던 수많은 피실험체 인간들을 고작 일주일 만에 아무런 죄책감 없이 전부 죽일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아귀가 맞다.


4. 맺는말: 예술 치료

포탈 2 스토리라인 상의 마지막 이야기이자 협동 모드의 히든 스테이지 격인 DLC ‘예술 치료’에서 글라도스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꼴을 보인다. 첼과 함께하는 모험에서 겪은 일들 때문에 조류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글라도스는 시설 내에 들어온 새 한 마리를 내쫓기 위해 로봇들을 동원하고, 유치하게도 복수를 한답시고 그 새의 둥지에서 깨어난 새끼 새들을 유리로 된 상자 안에 가둔 다음 조롱해 댄다.

글라도스가 새를 싫어하는 이유는 감자 배터리 안에 갇혀 있던 시절에 새가 자신을 쪼아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술 치료의 엔딩에서, 글라도스는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유리로 된 벽을 쪼아대는 새끼 새를 보고 트라우마 때문에 혐오스럽단 반응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매혹되기라도 한 것처럼 큰 관심을 보이고 ‘작은 살인 기계’라는 나름 명예로운 호칭을 붙여 주며 아예 스스로를 ‘엄마’라고 지칭하기까지 한다. 새를 인간으로 치환해 생각해 본다면 글라도스가 평범한 인간을 말로나마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글라도스를 이렇게 변화시킨 요소에 대해선 게임 내에서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는다. 필자 또한 무엇이 글라도스의 태도를 변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스테이지의 제목이 ‘예술 치료’라는 것이 힌트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할 수 있을 뿐이다.

예술 치료 DLC의 시작 부분에서 글라도스는 ‘오늘날 과학은 예술로서의 가치만이 남았다’고 말한다. 글라도스가 자신이 과학에 매혹되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으며 실제로는 인간적인 요소에 집착한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어쩌면 글라도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술 치료’, 즉 인간적인 요소를 통한 심리 치료를 받았던 걸지도 모른다. 다만 그 근원이 첼인지, 피실험체 로봇들인지, 아니면 피실험자였다가 죽은 수많은 인간들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그저 이제까지 글라도스에게 유의미한 심리적 변화를 가장 많이 야기한 존재는 첼뿐이었으므로, 인간 대상 실험을 하며 이들과는 달랐던 첼에 대해 곱씹다가 뭔가 깨달았을 거라 지레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확실한 것은, 싱글 플레이가 끝날 때까진 별로 성장하지 않았던, 혹은 자신의 성장을 자각하지 못했던 글라도스가 예술 치료 엔딩 시점에서는 조금이나마 성장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져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시설 내에 인간이라고는 단 한 사람도 남지 않은 엔딩 시점에선, 인간들에겐 별 의미가 없는 성장이지만 말이다.


#포탈 #별 #GLa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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